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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평의 ‘새로 보는 한국음악사’전인평(전 중앙대 교수) 한국문화는 한반도에서 홀로 발전해 왔을까? 아니다. 끊임없이 외래문화와 교류하며 혼융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 한국음악이다. 고구려는 실크로드를 통하여 서역음악(중앙 아시아)과 교류하였고, 신라는 당악을, 고려는 송의 대성아악을, 조선은 예약 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고, 현대에는 서양음악을 수용하였다. 오늘날 한국음악계의 K-classic과 K-pop이 세계를 휘어잡는 것은 바로 이러한 교류와 혼융의 결과이다. 고구려는 중앙아시아의 장구를, 신라는 당의 비파를 수용하였다. 고려는 대성아악을 받아들여 우리나라 무형문화재 1호인 종묘제례악이 탄생하였다. 현대에는 서양음악을 수용하여 피아니스트 임윤찬과 세계를 흔드는 BTS를 출현시켰다. 필자가 새롭게 보고 싶은 것은 바로 이러한 한국음악계의 교류와 혼융의 역사이다. 이 도서는 이러한 상황 인식에서 한국음악사를 객관적으로 보기 위하여 밖에서 보는 한국음악사를 서술하려 노력하였다. 이런 점은 기존 학설이나 기존 개론서와 메우 달라서 불편해 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제 필자가 2000년에 발행한 ‘새로운 한국음악사’를 증보 수정하여 ‘새로 보는 한국음악사’를 출간하게 되었다. 이번 수정 증보편에서는 필자가 전에 설정한 근대가 너무 광범위하다는 생각이 들어, 근대를 근세와 근대 둘로 나누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역사서 저술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시대 구분인데, 이 개정 작업으로 독자들이 더욱 선명하게 한국음악사 전개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24년 전 발간한 이 ‘새로 보는 한국음악사’(2000)는 그동안 이혜구 장사훈 송방송 황준연 백대웅 송혜진 전지영 등의 시각과 매우 다르다. 이러한 다름은 상호 보완 작업을 하여 한국음악사의 흐름을 보다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을 키워 주리라 생각한다. 무엇을 새로 볼 것인가? 이 책의 이름이 2000년 발행의 ‘새로운 한국음악사’에서 2024년 ‘새로 보는 한국음악사’로 바뀐 사연은 다음과 같다. 우선 필자가 평생 연구하였던 아시아음악 연구, 실크로드 음악연구, 한국음악의 장단 연구 등을 더 적극적으로 보완하였고 현대음악 편을 새로 보완하였다. 또한 초판에서 근대를 전기(중인음악 부흥시대)와 후기(서민음악 부흥시대)로 묶여 있던 것을, 근세(중인음악 부흥시대)와 근대(서민음악 부흥시대)로 분장하였다. 그리고 안악 3호분과 다른 외국 고분과의 관련성, 최치원의 향악잡영오수의 외부적 시각으로 본 재고찰,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있는 세틀형식의 양상, 그리고 세틀형식과 중국 대곡 형식과의 관련성 등, ‘세종실록’ 치화평의 장구 리듬과 굿 음악 장단 덩더궁이와의 관련성 등, 이러한 점은 다른 국악사 개론서와 다른 점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필자가 평생 연구해 온 창작국악 관련 생각도 대폭 보강되었다. 본격적인 한국음악사 개설서는 1975년 장사훈의 저술한 한국음악사(정음사)이다. 이후 송방송은 1984년 한국음악통사(일조각)을 발간하였고, 대한민국예술원에서 한국음악사를 장사훈은 1986년 자신의 한국음악사를 증보한 증보한국음악사(1986)를 발간하였다. 2000년에는 필자의 새로운 한국음악사(현대음악, 2000)가 나오고 송방송은 2007년 한국음악통사를 증보한 증보한국음악통사(민속원)를 발간하였다. 또한 송혜진은 "청소년을 위한 한국음악사"(두리미디어, 2007)를 전지영은 다시 보는 조선후기 음악사(북코리아, 2008)을 발간하였다. 이로 보면, 1975년 이후 2008년까지 8종의 음악사 개설서가 발행 또는 증보 발간되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2008년 이후로 새로운 한국음악사 개설서의 발간 증보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동안 국악계는 석박사 논문만 해도 한 해에 100여 편이 쏟아지고 있고, 연구자 또한 급증하였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해 보면, 이러한 공백은 매우 아쉬운 일이다. 나이 팔십에 이렇게 24년 전 출간한 책을 증보할 수 있게 되어 감개무량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에너지가 소진되고 있음을 실감하고 있다. 지난 2년 동안 이 도서 증보 작업에 매달려 살았다. 쓰다 보니 660쪽의 책이 되었다. 그동안 연구를 지속할 수 있도록 건강이 유지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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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42)<br>모내기철 논둑으로 향하는 그 어떤 사무치는 그리움쌀에 대한 명상 내게 그리고 우리에게 쌀은 무엇인가? 나는 그리고 우리는 쌀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했던 것인가? 여기서의 쌀을 문화나 문명으로 바꿔 읽어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7인의 사무라이'가 궁극적으로 지켜낸 것은 무엇일까 영화 '7인의 사무라이'만큼 많이 회자된 영화가 또 있을까 싶다. 그만큼 유명한 영화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를 토대로 리메이크된 많은 오마주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1954년 개봉하였으니 우리로 말하면 동족상잔의 화마가 채 가시지 않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세계적인 거장이라는 구로사와 아키라(黒澤明, 1910~1998) 감독의 흑백영화다. 영화의 줄거리나 주제는 일목요연하게 사무라이들의 의기투합과 전쟁을 다루고 있다. '황야의 7인' 등 리메이크된 수많은 영화도 이런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장식하는 모내기다. 사무라이들의 주제와는 별 상관없어 보이는 이 장면이 내게는 대미나 대단원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거론하는 수많은 비평이나 담론 중 모내기 장면을 거론하거나 의미를 부여하는 시선이 있는지 모르겠다. 유독 이 장면이 내게 선명하게 남아있는 이유가 뭘까. 15~6세기 일본 전국시대가 배경이다. 산적이 출몰하여 여자와 농작물을 수탈해가는 어느 농촌 마을에서 사무라이들을 고용한다. 사무라이들은 대부분 실직한 이들이어서 지금으로 말하면 부랑아 정도의 캐릭터들이랄까. 이런저런 에피소드 속에 일곱 명의 사무라이들이 모이게 되고 급기야 산적들과 전쟁을 치른다. 일곱 명의 사무라이들은 각각 독특한 성격을 연기하는 캐릭터들이어서 스토리의 전개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을 거장이라고 말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산적들과의 전쟁이 전체 장면을 이끌고 가지만, 세밀하게 묘사되는 당시 일본 농촌의 풍경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보리 수확하는 들녘의 풍경이며 모내기하는 산전답의 풍경이 그렇다. 산적과의 전쟁에서 이기지만 마을 사람들과 감베이, 시치로지, 가츠시로 세 명의 사무라이만 살아남는다. 사무라이의 대장 캄베이가 엄숙하게 말하며 영화가 끝난다. "또다시 살아..남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또 졌다. 이긴 것은 저기 농민들이야." 무슨 뜻일까? 여러 평론을 보면 사무라이와 농민들의 계급적 변별, 별 대가 없이 고용된 사무라이들의 신분적 한계, 결국 농민들 혹은 고용주(군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운명, 이런 종류의 해석이 주류를 이루는 듯하다. 사무라이를 주제로 한 영화라는 점에서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구로자와도 예기치 못했던 대미의 장면이랄까. 결국 사무라이를 고용해서 이들이 지켜내고자 했던 목표 혹은 목적이 무엇이었나 하는 점에 생각이 미치면, 마지막 장면이 또 달리 보일 수 있다. 산적들이 약탈해가던 것이 여자나 농산물뿐만 아니라 마을 풍경 그 자체였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구로자와가 드러내고 싶었던 일본적인 어떤 것, 마치 우리네가 근자에 열광하는 한류(韓流)와 같은, 한 때 글로벌한 바람을 일으켰던(지금도 그러하나?) 일본의 이미지를 연상하는 것은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이 영화 이후 리메이크되거나 오마주(구로자와에 대한 존경의 모사로서)된 일본의 문화가 세계적으로 회자되고 확장된 것이 그 사례이지 않을까. 비록 흑백으로 표현되었지만 수려한 일본의 산천과 보리와 쌀과 북장고 두드리는 리듬과 사람들의 노래와 어쩌면 문명 담론 같은 그런 풍경 말이다. 우리에게 쌀은 무엇인가 이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의 모내기는 우리네 남도지역의 모내기와 많이 닮았다. 동아시아를 관통하는 모내기 풍경이기도 하다. 우리의 고대 악기 비슷한 요고(腰鼓)와 흔히 벅구나 법고로 호명되는 작은 북, 꽹과리와 비슷한 작은 징쇠, 차양 넓은 볏짚모자며 모심는 동작에 맞춰 부르는 노래 따위가 그렇다. 일본의 남쪽 섬들인 아마미오오시마나 오키나와 등지의 모내기는 지금도 이런 풍경이 연출된다. 머리에 덩굴풀을 두르고 이런저런 의례와 함께 모내기를 하는 것은 내 고향 진도의 들노래 풍경과 흡사하다. 중국의 동북지역이 양걸(秧歌) 장르로 확장되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내가 십수년 답사했던 동아시아의 모내기 장면이 대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과 다르지 않다. 대미(大尾)의 장면이 내게 오랫동안 남아있었던 것은 아마도 이런 것이었다. 은연중 드러난 혹은 숨겨진 메타포, 쌀을 지키기 위한 서사 말이다. 구로자와가 말하고자 했고 마을사람들이 지키고자 했던 내면의 풍경, 예컨대 중국의 장이머우(张艺谋) 감독이 <붉은 수수밭> 등 수많은 영화와 연출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붉은색의 중국에 비견된다고나 할까.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려내고자 했던 생태환경 중심의 애니메이션 풍경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나는 이 영화의 이면에 숨어있는 쌀을 봤다. 쌀이 가진 동아시아적 배경, 쌀이 가지는 문명적 함의 때문일 것이다. 감베이의 마지막 대사처럼 전쟁에서 그들이 지켜낸 것은, 다름 아닌 모내기의 풍경, 쌀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무라이의 시선에서는 이기고 지는 싸움일 것이지만 마을 사람들 시선에서는 대대로 살아온 마을과 사람과 풍경과 그 기반이 되는 쌀을 지켜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래서 묻는다. 일본에게 쌀은 무엇인가? 왜 그들은 쌀을 지키려고 했던 것인가? 내게 질문한다. 내게 그리고 우리에게 쌀은 무엇인가? 나는 그리고 우리는 쌀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했던 것인가? 여기서의 쌀을 문화나 문명으로 바꿔 읽어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바야흐로 모내기철에 들어선다. 오래된 일이긴 하지만 우리네 고향에서는 북치고 장구치고 작은북 벅꾸 두드리며 모내기를 했다. 마치 영화 '7인의 사무라이' 마지막 장면처럼 모내기 노래를 불렀다. 머리에는 덩굴풀 뜯어 감고 차양 깊은 삿갓이 무논에 잠기도록 느린 굿거리장단에 호흡을 맡겼다. 아무런 의미도 없고 아무런 목적도 없는 듯했지만 결국에는 그런 리듬이 있어 쌀을 지켰다. 영화 속의 사무라이 같은 누군가 있어 어떤 불한당 산적들을 '이길 수' 있었다. 모내기철을 맞는 지금의 내 마음이 그렇다. 사무치는 어떤 그리움이 논둑에 나를 불러세우는 것인가. 누가 산전답 어딘가에서 목청 높여 쌀을 노래하는 것인가. 은유의 쌀, 정체성으로서의 쌀 쌀은 전 세계 대륙 전체에서 재배하고 먹는 곡물이다. 열대몬순, 온대몬순, 실크로드, 유럽, 미국 등을 포괄한다. 전 세계 사람들이 섭취하는 전분의 22퍼센트가 쌀에서 나온다. 통계에 따라 순위는 달라지지만 밀, 옥수수와 더불어 3대 곡물이다. 아마 쌀을 기피하고 빵을 선호하는 우리네 식습관의 변화대로 밀의 수요가 훨씬 많아졌을 것이다. 고기를 즐겨 먹는 식습관 변화로 사료용 곡물이 증가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인디카, 자포니카로 대변되듯 쌀은 아시아의 문화 혹은 문명을 대변한다. 우리도 예외일 수 없다. 기회가 되면 쌀의 문명사를 따로 다루겠지만 우리에게 쌀은 '생명'의 또 다른 은유이기도 하다. '쌀의 인류학'을 쓴 오누키 에미코는 이 책에 '일본인의 자기인식'이라는 부제를 달기도 했다. 쌀이 타자와 비교되는 '자기 자신'이며 일본의 상징이고 은유라는 점을 강조했다. 우리는 어떠한가. 쌀이 내 자신인가. 우리의 은유인가. 쌀을 통해 나의 정체를 혹은 내가 한국인임을 인식할 수 있는가. 사방의 무논에 모내기하는 풍경을 바라보며 느끼는 소회다. 우크라 전쟁으로 식량자급에 대한 대책들이 논의되는 모양이다.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아직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쌀을 지키는 것이 내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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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36)이윤선/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 초의와 차선고도 남도의 물길 따라 교우했을 옛 연인의 터에 앉아 그윽한 차향 맡는 것 어쩌면 내게 주어진 과분한 소확행일지 모르겠다 연하(烟霞)가 난몰(難沒)하는 옛 인연의 터에/ 중 살림 할 만큼 몇 칸 집을 지었네 못을 파서 달이 비치게 하고/ 간짓대 이어 백운천(白雲泉)을 얻었으며 다시 좋은 향과 약을 캐나니/ 때로 원기(圓機)로써 묘련(妙蓮)을 펴며 눈앞을 가린 꽃가지를 잘라버리니/ 좋은 산이 석양 노을에 저리도 많은 것을. 초의선사가 일지암을 짓고 지은 시라 한다. 일지암을 아는 사람들은 이 시가 형용하고 있는 풍경을 금방 떠올릴 수 있다. 짙은 운무 출몰하는 비경과 초암에 앉아 차 한잔하는 즐거움이 보이지 않는가. 대흥사 일지암이 지금은 운용의 묘를 살린 탓인지 여러 채의 절간들이 들어서 있지만, 그 중심은 예나 지금이나 초암 곧 일지암에 있다. 추사 김정희와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각양의 인사들과의 교류가 낳은 총화라고나 할까. 여기에 초기 카톨릭의 숨겨진 영향까지 거론한다면 불선(佛禪)을 넘어선 유불선기(儒佛仙基)를 거론해도 무방하리라 본다. 초의는 본래 무안(당시에는 나주에 속함) 삼향 사람이다. 지금은 삼향에 초의기념관이 들어서 있고, 용운스님의 노력으로 일지암도 재현해두었다. 어떤 인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 또한 이곳에 터를 잡고 주경야독하는 중이다. 나는 곧 출판되는 졸저에서, 무안만(남도만과 무안만에 대해서는 본 칼럼에 여러 차례 소개하였다)의 차와 이를 재구성할 차선고도(茶船古道)를 상정하고 '고양의 길'이라는 표제를 붙여 두었다. 불교 중심으로 차 문화가 확장되었고, 스님들 중심으로 차 생활이 보편화 된 것도 어찌 보면 스스로를 고양하는 첨단의 콘텐츠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세간에 차와 명상, 힐링, 수련, 영성 등의 조합을 이룬 다종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있는 것을 보면 이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추사가 남긴 명선(茗禪)이라는 글씨가 그 행간에 있다. 추사가 초의에게 지어준 호이기도 하다. 대개 이를 '차를 마시며 선정(禪定)에 든다'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문자 그대로 명(茗)은 차의 싹을 말하는 것이니 차를 마시며 선을 행한다는 것 아니겠는가. 구체적인 차선고도의 루트나 프로그램을 여기서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차가 명상이나 요가, 이른바 마음수련에 있어 최고의 콘텐츠라는 생각은 부기해 둔다. 정민 교수의 작업에 기대어 차선고도(茶船古道)를 상상하다 중국에서 한해륙에 이르는 이른바 뱃길을 전제해본다. 초의에 앞선 차문화 정리의 맥락이기도 할 것이다. 정민이 쓴 '잊혀진 실학자 이덕리와 동다기'(글항아리, 2018)는 차선고도를 설정하는 데 매우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지면상 몇 가지만 인용해 공부자료로 삼는다. "18세기 중반 이후 청나라의 해금 정책이 풀리자 중국의 서남해안에서 북상하는 뱃길이 열렸다. 배를 통한 물류의 이동이 빈번해지면서 서남 연안에 중국 상선의 표착이 부쩍 늘어났다. 특별히 1760년 서해안에 표착한 중국 배에는 황차(黃茶)가 가득 실려있었다." 또 이덕리의 '기다' 중 '다설' 제3조에 남은 기록을 보고하고 있다. "경진년(1760, 영조36)에 차 파는 상선이 와서 온 나라가 그제야 차의 생김새를 처음으로 알았다. 이후 10년간 실컷 먹고 떨어진 것이 하마 오래되었는데도 또한 채취해서 쓸 줄은 모른다. 이렇게 보면 우리나라 사람에게 차는 그다지 긴요한 물건이 아니어서 있고 없고를 따질 것이 못 됨이 분명하다. 비록 물건을 죄다 취한다 해도 이익을 독점한다는 혐의는 없을 것이다." 정민은 이외에도 박제가의 '북학의'를 인용하며 1760년에 왔다는 표류선의 존재를 보고하고 있다. 황차와 관련된 내용이다. 지면상 다 소개할 수는 없지만, 관심 있는 분들은, 1762년 11월 7일자 '승정원일기'에 등장하는 표류선 기사를 참고해도 좋다. 정민은 사흘 뒤인 11월 12일자 '승정원일기'를 인용하며 중국 표류인들이 가져온 황차를 언급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렇게 얘기한다. "표류선 관련 기록에서 황차가 등장하는 것은 이때가 유일하다. 고군산진에 표착한 절강 상인의 배에 황차엽이 대량으로 실려있었고 당시 금주령 상태에 있던 조선에서 이 황차는 제사 때 쓰는 제주(祭酒) 대신으로 각광을 받아 수요가 갑작스럽게 급증하게 되었던 사정이 짐작된다." 이 시기 중국 남쪽 배들의 서남해안 표착이 상당히 빈번해지기 시작했고 금주령 하의 시대 상황과 맞물려 황차가 특수를 누리면서 비로소 차의 존재가 조선인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초의의 차를 가까이하게 된 것도 이런 시대적 맥락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초의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이덕리를 공부할 필요가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정민의 연구들을 주목해야 한다는 생각을 줄곧 하고 있다. 초의 이전의 이덕리에 대한 정보는 정민이 거의 유일하고도 상세하게 연구해놓았기 때문이다. 차마고도에서 차선고도까지 주지하듯이 차마고도(茶馬古道, Ancient Tea Route/ Southern Silk Road)는 비단길보다 먼저 생긴 무역로이다. 중국의 윈난성, 쓰촨성에서 시작된다. 티베트, 인도, 파키스탄 등지를 거쳐 실크로드로 이어진다.위키사전의 설명을 빌리면, 마방(馬幇)이라 불리는 상인들이 말과 야크를 이용해 중국의 차와 티베트의 말을 서로 사고팔기 위해 지나다닌 길이다. 차와 말만 사고팔았겠는가. 당연히 이곳을 통해 문화의 교류가 활발해 졌음을 알 수 있다. 전성기에는 유럽까지 연결되기도 했다. 해발고도 4000미터가 넘는 험준하고 가파른 길이지만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길로도 유명하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은 2007년 KBS에서 6편으로 구성한 차마고도에 관한 다큐멘터리 '인사이트 아시아-차마고도'부터이다. 나도 여러 차례 윈난지역을 방문하여 관련 정보들을 갈무리한 적이 있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무역로라고 추정하는 길이기도 하다. 차선고도(茶船古道)는 이에 착안한 것이다. 광의의 차선고도는 멀리 중국으로부터 뱃길을 통해 우리와 연결된 항로 혹은 차도(茶道)를 말하는 것이고, 협의의 차선고도는 초의선사의 생가인 현 무안군 삼향읍 왕산리 혹은 신기마을에서 출발하여, 어린 나이에 출가한 나주의 운흥사로, 다시 평생을 보낸 해남 대흥사의 일지암까지 이어지는 길, 나아가 강진, 보성, 하동 등을 연결해본 것이다. 지금은 뱃길이 막혀있지만, 물골이 있던 때를 상상하여 이 루트를 재구성한다면 틀림없이 유의미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우연인지 필연인지 초의선사 생가 아래 오두막 하나 짓고 살면서 차에 대해 상고해나가는 중이다. 아마 초의선사가 고금의 중매역할을 하였던 것 같다. 기회가 되면 소개하겠지만 차는 분청사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찍이 일본인들이 국보급 예우를 했던 분청사기는 사실 남도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생활 용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우리보다 먼저 이들이 분청이 가진 미학에 주목하였고 끝내 일본 최고의 다기로 대접하기에 이르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차나무에 귀를 대고 들으니 곧 새싹이 올라올 듯하다. 아, 봄이로구나. 올해는 보다 어린잎을 따서 황차를 만들어 볼 생각이다. 남도의 물길 따라 교우했을 옛 인연의 터에 앉아 그윽한 차향 맡는 것, 어쩌면 내게 주어진 과분한 소확행인지도 모르겠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대선이 끝났다. 승자에게는 축하의 차 한 잔, 패자에게는 위로의 차 한 잔 건넨다. 승자는 승자대로 패자는 패자대로 역할이 있을 것이다. 혐오와 배제는 저만치 던져버리고 오직 나라의 융성을 도모하는 데 힘을 합치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라 생각한다.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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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21)이윤선/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 말라카 황징항(皇京港)에서 마조해협까지 오래전 중국 복건성 천주시에 갔을 때 깜짝 놀랐던 것이 있다. 신라여관, 신라 주유소, 신라 다리 등 신라라는 수식을 건 간판이나 이름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적화원이라는 절을 복원하여 관광지가 된 산둥반도 석도진을 포함해 신라관, 신라방, 신라소, 신라원의 거점이 천주시를 위시한 복건성 지역이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내가 3년여 오가며 현장조사를 했던 절강성 주산군도의 보타도 앞에는 심지어 '신라초'라는 이름의 암초가 있다. 얼마나 많은 신라의 배들이 이곳에 부딪혔으면 신라초(新羅礁)라는 이름을 붙였겠는가. 혹은 얼마나 많은 신라 사공(선장)들이 배를 몰고 이곳을 지나다녔으면 이같은 이름을 붙였겠는가. 물론 신라초에는 신라로 싣고 오려던 관음불과 관련된 몇 가지 설화들이 있다. 보타도의 조음동(潮音洞)은 낙산사 홍련암과 설화 맥락이 거의 동일하다. 아쉽게도 일본에서 먼저 이곳에 사찰을 세우기는 했지만, 관음보살을 넘어서는 고대로부터의 아시아적 네트워크 흔적임에는 틀림없다. 이곳 복건성과 절강성을 횡단하는 마조(媽祖)해협으로부터 말레이시아 말라카해협은 단순한 물길이 아니다. 시진핑이 정화(鄭)의 원정 내력을 들어 일로(一路)의 비전을 세운 것도 이 해양실크로드가 가진 중요성 때문이다. 심지어 주산군도에서 시작한 어민화(어민들이 그리는 민화)도 실크로드의 기점으로 활용하고 있다. 중국이 투자해 짓고 있는 말레이시아 말라카 황징항(皇京港)도 맥락이 같다. 나는 오래전 말라카해협의 정화박물관에 들러 이곳을 오고 갔을 고대의 한반도인들을 떠올리곤 했다. 신라초니 신라방이니 하는 거점의 신라인들이 필경 정화 못지않은 선박운영을 하였을 것이고 종교적인 맥락으로만 말하더라도 불교의 관음 네트워크를 넘어 이슬람교와 힌두교 혹은 더 이전의 브라만교나 시바교에까지 닿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실제 가야 방면의 여러 사찰에서 산견되는 요니와 링가 등의 힌두교 흔적들은 가야국 수로왕과 허황옥 전설을 넘어서는 상상들을 가능하게 해준다. 변산반도 죽막동 출토 유적들이 오키노시마와 양자강 하류의 유적과 동일하다는 점을 비롯해 해남 등 서남해에 출토되는 중국발 유물들을 통해 이를 충분히 확인해볼 수 있다. 신라인이라는 호명은 백제로 마한으로 아니 더 이전의 한반도인들로 거슬러 오른다. 그래서 드는 생각이다. 중국의 해양실크로드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제는 해양과 관련된 지정학적, 철학적 아젠다를 내세워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 아니 중국에 비해 너무 늦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다. 해경표(海經表)의 새로운 구상 해경표란 무엇인가? 내가 오랫동안 제안해온 갱번론(gengbone theory)의 하나다. 해항도시니 강항도시니 하는 사람 중심의 지정학을 넘어선 생태학적 포지셔닝이기도 하다. 지난주 이미 갯벌이 'Getbol'이라는 우리 고유명칭으로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바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Gengbone'(본 칼럼에서 수차례 제안했으므로 더 이상의 설명은 피한다)이라는 명칭이 가지는 의미에 관해서다. 신경준(1712~1781)이 썼던 <산수고(山水攷)>와 <강계고(疆界考)> 등을 토대로 우리 국토를 산맥 중심으로 해석한 것이 이른바 <산경표(山經表)>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지리산에 이르는 산맥을 대간(大幹)으로 읽고 거기에 12지류를 정맥과 정간으로 읽으며 그 안의 도시와 강과 섬들을 배치하는 국토 인식론이다. 설정해둔 산이나 도시들을 보면 중앙중심, 수도 중심의 사고와 12지라는 철학적 사고가 직조해낸 철학 체계임을 알 수 있다. 중심으로 설정한 한양이나 개성 등은 백두산에 이르고 심지어 마고산에 이른다. 실증을 중시하는 주류사학계든, 일종의 관념을 투사하여 인식의 범주를 넓히려는 비주류 사학계든 이 산맥 중심의 사고는 서로 대립적이지 않다. 이들의 관념에는 단군신화의 동굴도 백두산에 있고 환웅이 천부인을 갖고 하늘에서 내려온 신단수와 신시도 백두산에 있다. 고구려와 발해를 전제하는 이 지정학적 지향임에도, 급기야 백두산을 넘어 히말리야에 이르고 마고여신과 마고산이라는 정점으로 치닫는다. 산경표의 인식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다. 나는 거꾸로 해경표(海經表)를 제안한다. 지면상 짧게만 언급하면, 적도 상간의 흑조(黑潮, 크로시오해류)로부터 한반도를 향해 거슬러 올라오는 물골(해류와 조류 포함)론이다. 흑조의 본류는 일본의 동쪽을 거슬러 올라 태평양을 횡단한다. 여러 개의 지류 중 황해난류(한국연난류)가 한해륙 서해로 올라오는데 그 정점 혹은 기점에 흑산도(黑山島)가 있다. 흑조의 끝이어서 흑산도다. 이 지류는 내륙으로부터 내려오는 물길 좇아 큰골과 작은골들을 만들고 갯벌 먼 끝에서 내륙 깊은 곳에 이르러 회합한다. 갱물과 민물이 만나는 지점, 시대가 어려울 때마다 향나무 묻어 천년 후 오실 메시아를 기원하던 바로 그 지점이다. 이 권역을 통칭해 조간대(潮間帶) 이른바 갯벌이라고 한다. 불교의 관음과 미륵이 그렇고 기독교의 메시아가 그러하며 1900년 어간 900여 개에 달하던 신종교의 몸부림들이 그러하다. 근자에 일어나고 있는 코로나의 범람은 유럽을 휩쓸었던 흑사병보다 더한 시대적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 패러다임의 변화, 생활 태도의 변화, 마음의 변화, 아니 모든 것을 통째로 바꿀 것을 요구하고 있다. 중국처럼 일대일로의 욕심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제는 섬과 바다와 해양으로 눈을 돌려야 할 때다. 거기에 시대적 비전도 있고 희망도 있으며 심지어 먹거리도 있다. 해경표에 주목하기를 권유한다. 한해륙 4대 물골론(中灣, Middle Bay)과 6대 작은물골론(小灣, Small Bay) 갯벌의 철학적 인유(引喩)이자 해정학(海政學)적 포지셔닝이다. 남도인들의 인식 범주, 바다를 강으로 생각하고 강을 바다로 생각하는 대대적(對待的) 사고의 형상화다. 출처는 강변(江邊, reverside)이되 조하대의 보이지 않은 물길까지 포괄하는 갱번이다. 강항(江港)이나 해항(海港)보다 강포(江浦)라는 용어를 채용하는 것은 개(갱번)의 어귀라는 생태적 입지 때문이다. 한해륙을 4대 물골로 설정하고 6대 작은물골로 구성한다. 첫째는 무안만(務安灣)이다. 지금의 영산강이 본래 바다였다는 사실을 전제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삼면의 바다, 삼대 중사(中祀)였던 영암 남포로, 광주와 담양으로 오르는 물골과 법성포 고창으로 오르는 물골을 포괄하는 만(灣)이다. 기점에는 흑산도가 있고 정점에는 마한 문화권이 있다. 둘째는 금강만이다. 부여, 공주, 논산으로 오르는 금강, 백강 물골과 김제, 전주 물골을 포괄한다. 기점에는 위도와 고군산군도가 있고 정점에는 부여, 공주 백제 등이 있다셋째는 경기만이다. 예성강, 임진강으로 북한강, 남한강으로 흐르는 한해륙 가장 중요한 물골이다. 기점에는 덕적군도가 있고 정점에는 고구려, 신라를 포괄하는 개성 고려, 한양 조선 등이 있다. 넷째는 발해만이다. 범주가 너무 넓어 황하만(베이징, 톈진), 요하만(다렌, 창다오), 압록만(단둥, 신의주), 남포만(대동강, 평양), 해삼위만(블라디보스토크)으로 다시 나눈다. 이외 6대 작은물골(small bay)로 강진만, 여자만, 김해만, 울산만 외 발해만의 중만(middle bay)으로 설정했던 남포만, 압록만을 포함시킨다. 김해만은 가야의 네트워크, 울산만은 경주 신라의 네트워크 물골이다. 6대 작은물골은 다시 작은 강과 하천으로 올라 백두산 천지연과 삼지연에 이른다. 거꾸로 보면 보인다. 남성에서 여성으로, 불에서 물로, 서양에서 동양으로, 지난 1~2세기 동안 현자들이 이구동성 외쳐왔던 후천개벽, 새로운 시대의 기점을 마련하는 방안이다. 그 시작에 적도(赤道)를 둔다.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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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나의 역사전쟁'동국대학교 교수를 퇴임한 윤명철 교수는 행동하는 역사가이다. 역사의 현장을 찾아 직접 몸으로 답사해서 그곳에서 역사의 의미를 새롭게 발굴하는 방식이다. 윤명철 교수가 지난 해부터는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드에서 교수로서 강의를 맡으며 중앙아시아 역사에 한국사를 접목하는 일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마침 여름방학을 맞아 일시 귀국한 윤명철 교수를 (주)국악신문 이동식 대기자가 만나보았다. Q. 오랫만입니다. 최근 근황이 궁금합니다. A. 지난해 7월부터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드에 있는 국립대학교 고고학과 초청 정식 교수로서 강의와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과목은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여러나라의 문화연관성이고요 가을 학기부터는 중앙아시아의 고대 종교, 신화 등을 강의할 예정입니다. Q. 벌써 30년 전인가요, 윤 교수님은 젊을 때 똇목을 타고 동아시아 바다를 직접 건너간 것에서 시작해서 전 세계의 중요 지역을 답사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동안 어느 지역을 다니셨습니까? A. 아이구! 뗏목 탐험은 정말 젊을 때 일이고요, 몇년 전에는 경주에서부터 중국을 거쳐 투르키에의 이스탄불까지 육로로 자동차 탐험을 한 적이 있고요, 배를 타고 유럽 쪽 북해를 거슬러 올라가 보기도 했고 블라디보스톡에서 모스크바를 잇는 트핸스 시베리아 열차 탐사를 24일 동안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Q. 왜 그렇게 많이 다니시는 것입니까? A.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지요. 우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 유라시아 대륙인 만큼 거기에 사는 사람들 속에서 우리 역사의 풍부한 원형을 확인하고 이를 통해 아득한 시원의 시간동안 민족의 형성과 이동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들의 생존 조건은 무엇이었는지, 그것이 역사와 문화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파악해서 우리 역사를 재구성해내기 위함입니다. 먼저 현장을 가야 공간의 범주를 알 수 있고, 생태환경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어요. 특히 만주 일대는 현장에 가지 않으면 모릅니다. 저는 고조선을 원조선이라고 부르는데, 원조선과 고구려, 발해의 역사를 알려면 만주지역을 알고 생태환경을 알아야 합니다. 생태환경이 다르면 생산양식이 달라지고, 생산도구가 달라져요. 생산도구가 달라지면 그에 따라 생활양식이 달라지고, 또 민속, 신앙이 달라집니다. 그러면 철학이 달라지고, 이 모든 것을 총괄하는 시스템, 정치가 달라지는 것이죠. 그러면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먹고 살았고 어떻게 적과 싸웠으며 그들의 신앙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 애정을 갖고, 역사에 대해 진지한 마음을 갖게 되죠.. Q. 중앙 아시아에서 강의를 하시려면 언어문제는 어떻게 됩니까? 설마 현지어를 하시는 것은 아닐 것이고? A. 아, 물론 제가 현지어를 능숙하게 하는 것은 아니고요, 다행히 한국에서 오랫 머물었던 유능한 현지인이 통역을 해주셔서 가능합니다. Q. 여전히 궁금한 것은, 아직 긴 기간은 아니지만 타국에 가 계시면 힘들텐데요? 윤: 네 그렇지요. 다행히 집사람이 같이 가 있습니다. 그곳 사람들이 우리 70년대처럼 정말 친절하고 정이 많아서 집사람이 아주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다른 분들도 기회가 돠면 와서 살아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Q. 그 나라에서 우리 한국에 대한 관심은 어떻습니까? 윤: 관심이 그냥 많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많습니다. 한국은 자유시장 경제로 성공한 사례인데, 그 나라는 소련이 무너진 뒤에 사회주의 체제에서 자본주의 시장 경제로 전환하는 과정인 만큼 한국의 경험이야말로 그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또 의외로 한국을 다녀온 노동자들이 많다는 점입니다. 수도 같은 데서는 스무 명 중 한 명 꼴로 한국에 가서 일을 하고 돌아오신 분들이 있는 곳도 있어요. 이곳 분들이 부지런하고 성실해서 한국에서도 좋아했고요, 돌아와서도 한국에 대한 인상이 좋은 편입니다. 그래서 저희를 환영하고 뭐라도 도와주시려고 해서 고맙습니다. Q. 사마르칸드라고 하면 아프라시압의 벽화무덤 속에 있는 한반도의 무사 그림이 유명한데, 한 때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인인가, 신라인인가 하는 논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A. 아프라시압은 6~7세기 그 일대의 수도로서 번성하다가 사마르칸드로 중심무대가 옮겨진 곳인데, 당시 상황으로 보면 고구려인이라고 봐야지요. 고구려의 전성기는 광개토대왕, 장수왕 이후라고 본다면 5~7세기인데 당시 중앙아시아의 주인공은 소그드인들이고 이들이 초원지대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유럽과 동아시아, 중국 당나라를 잇는 핵심 교량 역할을 했습니다. 고구려와도 그때부터 교류가 있었고요. Q. 그렇다면 단순히 돈이나 물자만 오고갔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A. 그렇습니다. 당나라 역사에 소그드인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유명한 이태백의 시에도 이들이 추는 춤인 호선무(胡旋舞)가 등장할 정도인데, 그들을 통해서 음악, 악기, 춤, 서커스, 그리고 음식재료와 조리방법 등 삶의 곳곳에서 교류가 이뤄졌다고 보여집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나라 고구려도 이런 문화의 유입이 많았고요, 고구려 벽화 고분을 보면 그런 장면들이 많이 있지요. 저는 그런 교류의 역사도 현지에서 더 새롭게 발견하고 규명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Q. 우리는 실크로드를 통해서 서쪽 문화가 들어오고 중국에서는 비단이 간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여기는 더 북쪽 아닌가요? A. 근세 유럽인들이 실크로드를 답사하면서 사막 남로와 북로를 개념화했습니다만 저는 그 문물의 이동과 교류의 핵심은 오아시스를 연결하는 길을 통해 이뤄졌다고 보고 '오아시스로드'로 이름을 바꾸어 부르자고 말합니다. 실제로 사막이건 초원이건 오아시스가 없으면 길이 열리지 않으니까 이제는 넓은 시각의 오아시스 로드라는 측면에서 이 지역 역사를 다시 들여다 보고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작업을 제가 하고 있고요. Q. 우즈베키스탄에서 TV출연 등을 많이 하신다고 하던데 A. 네 그곳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 문명의 길목의 주인공이었던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 점을 나서서 알려드리고 있고요. 이들을 통해 우리와도 역사적으로 많은 교류가 있었다고 말하지요. 나아가서는 그 옆에 투르키예인들의 나라와 역사가 있었고 이들 역시 고구려와 역사적으로 많이 연결돼 있어서, 그들의 후예인 투르키에 인들이 우리를 형제나라라고 하는 것도 다 그런 이유입니다. 그런 중앙아시아를 무대로 한 역사와 문화의 교류를 새롭게 찾아내고 의미를 알리는 일입니다. Q. 하실 일이 엄청 많은 것 같습니다. 올해 초에는 미국 예일대에서 강의를 하신 것이 화제가 되었습니다만 A. 네 지난 2월 예일대 특강 때에 역사에 대한 저의 지론인 ‘ 행동학’을 강조해서, 참석자분들의 많은 호응을 받았습니다. 그분들은 우리 역사를 잘 모릅니다. 그들에게 "우리 민족은 역동적인 노마드 문화와 농경 정착문화가 복합된 모스테빌리티(Mostability)형 문화”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또 만주의 역사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고구려 시기 중만주까지는 직접 통치하고, 그 너머의 지역은 해당 지역 사람을 통해 영향을 행사하는, 그러니까 여진족, 말갈족들이 용병으로 동원되었죠. 하지만 그 북쪽인 서북 만주 같은 경우는 간접 영향권일 뿐이에요. 이들 북방민족이 중국으로 건너가 요, 금, 원, 청과 같은 정복국가를 세웠지만 우리는 요동과 한반도를 고수했어요. 우리가 힘이 있지만 그 쪽을 굳이 편입시키지 않은 것도 우리 민족이 갖고 있는 ‘홍익인간’의 개념이 깔려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21세기 인류가 지향하는 문명과 일치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국이 고대부터 만주와 한반도뿐 아니라 바다를 통해 진출한 해륙국가라는 ‘동아시아 지중해 모델’에 대해 설명을 했고 거기에 참석자들의 관심이 많았습니다. 어떤 분은 ‘아시아의 바이킹’으로 불렸던 발해에 대해 궁금해했습니다. 해양문화의 특성은 보존되지 않는 것인데, 발해의 조선술에 관해서도 그 점을 지적하면서 발해의 배는 바이킹의 배와 비슷했을 것이라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Q. 밖에 나가계시면서 국내활동도 하신 것 같던데, 김지하 선생을 추모하신다고요? A. 추모를 넘어서서 그를 사상가로서 재조명하는 작업입니다. 지난 5월 초 1주기를 맞아 김지하의 생명사상에 대한 학술포럼을 연 바 있습니다. 김지하 씨는 민주화운동가, 혁명가, 시인, 사상가 등 다양한 명칭으로 한국 현대사에 큰 위상을 남겼고 평생을 인권, 자유, 양심, 민족, 문명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연구했으며, ‘생명사상’이라는 자기의 논리와 사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런 김지하씨는 이제 사상가로서 다시 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그의 특정 발언이나 행위, 선택에 대해 굴레를 씌우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김지하 씨는 소년 시절부터 말년 혹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일관된 삶을 살았다. 진실을 찾으려 했고,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며, 무엇보다도 세상에 대한 소명감이 강했습니다. 지금 한국인에게는 끝없이 진리를 탐구하고 실현시키는 실존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의 존재가 필요합니다. 김지하의 사상과 문학, 사회적 삶은 미래 세대의 모델로서 필요하고요, 지금 우리 한국 상황은 비정상적이고 사회적 위기를 맞고 있는데 이를 극복할 ‘사상’과 이를 이끌어 갈 사상가로서 김지하의 생명사상이 필요한 것입니다. Q. 다시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가면 강의만이 아니라 그곳에서 여러 행사를 진행하신다고요 A. 네 한국에서 근무했던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을 초청해서 친목을 다지자는 목적으로 '코리안 데이’를 준비해서 10월19일에 사마르칸트시에서 엽니다. 사람과 음식, 음악, 풍습 등을 교류하는 자라입니다. 또 한국에서 발칸반도 99일간 99개국을 찾아가는 '유라시아 플로우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플로우(flow)는 흘러가다라는 뜻이 있죠. 바로 우리 민족의 풍류 사상을 유라시아 플로우라고 바꾼 겁니다. 그래야 서양인에게 설명이 가능하니까요. 신라 대학자 최치원이 "우리 민족에게 유‧불‧도(儒佛道) 세 가지를 모두 아우르는 현묘지도(玄妙之道)가 있다”라고 했던 바로 그 풍류입니다. 당연히 풍류는 홍익인간 사상이죠. 인류 문명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흐름이잖아요. 물류죠. 그리고 플로우는 종횡무진을 뜻합니다. 그동안 실크로드, 초원의 길이라고 하나의 길, 횡단 길이라고 보았지만 아닙니다. 문명은 종단로도 있었어요. 그런 네트워크를 찾아가는 작업니다. Q. 윤 교수님은 천산 알타이 등 중앙아시아 지역 탐사를 중요시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A. 제가 중앙아시아를 중요시하는 이유 중의 하나로는 중앙아시아가 우리의 21세기 생존전략의 주무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원의 보고이고요 무한한 시장이 열릴 곳이기도 하고요. 그것보다도 우리 민족의 정체성의 원형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기에 문명 이전 인류문명의 모델로서 천산과 파미르 고원일대의 삶의 조건과 거기서 펼쳐지고 지켜지는 삶의 의미를 다시 찾아 살려보는 것입니다. 제가 추진하는 '유라시아 플로우'도 그 일환입니다. 단순히 탐방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사람들과 만나고 하나가 되는 페스티벌도 열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역사의 시발인 원조선을 다시 보고 중앙아시아의 흥먕성쇠가 우리 역사와 어덯게 연결되고 영향을 주었는지를 보고 이들과 우리의 인연을 현재로 이어주는 것입니다. Q. 아, 말씀이 끝이 없습니다. 나중에 또 듣기로 하고, 마지막으로 현대의 우리민족에 대해 어떻게 보시고 우리의 앞날을 어떻게 열어가면 좋은지 듣고 싶습니다. A. 옆 동네인 키르키즈스탄에서는 K-팝 경연대회를 일 년 마다 열고 있는데 참가팀이 100팀이 넘고 수준도 놀랄 정도입니다. 이렇듯 우리 문화의 힘이 중앙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우리 문화의 힘은 역동성과 다양성에 있습니다. 우리가 잘 모르는 고구려문화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우리 문화는 단순히 연결 시켜주는 브릿지, 혹은 교량이 아니라 다시 가공하고 키워내는 교차로 입니다. 최근의 우리 한류가 그걸 말해주고 있지요. 우리 문화는 이제 중앙아시아를 바로 가로 질러 유럽까지 이어지는 문화오아시스로드의 동쪽 기점이자 샘입니다. 이제야말로 문명사적으로 말하면 동쪽에서 서쪽으로 진행하는 것이지요. 이제 이러한 지정학적인 문제, 시대적인 상황을 고려해서 폐쇄적이지 않은, 개방적인 생각으로 전 세계를 담아 새로운 문화로 다시 키워내야하는 시대입니다. 좁은 국내, 정치의 잘못된 연못에서 나와서 세계에 맑은 물을 집어넣어주는 문화창조의 중심지가 되어야 할 것이고 그러려면 마음을 넓히고 눈을 멀리 두어야할 것입니다. Q. 역사학자로서 밖에 나가서 느끼는 점이 있을 것 같은데요 A. 역사학에 대해서 생각해본다면 역사학자들이 학문적 사대주의와 연구방법론에 대한 교조적인 자세에서 탈피하고, 개방적이고 자신있는 태도로 현실과 역사에 책임감을 지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일본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역사학과 역사학의 본령(本領), 또 우리가 지향하는 역사학이 다른데 우리는 일본이 가르쳐준 것이 역사학의 본령이라고 오해했던 측면이 많습니다. 주체적인 동아시아 역사상을 확립해야하고, 지구문명사에 대한 동아시아적인, 한국적인 견해와 해석도 자신있게 펼칠 시기가 도래했습니다. 즉 ‘동아시아 담론’ ‘지구담론’을 펼쳐야 하며, 특히 고대사연구를 통해서 민족문화의 원형과 인류의 발전모델로 찾아내는 자세를 지니는 것이 필요합니다. Q. 좋은 말씀 많이 잘 들었습니다. 긴 시간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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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가 품은 식물 이야기’ 출간‘삼국유사가 품은 식물 이야기’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선덕여왕의 이야기로 모란은 향기가 없다고 흔히 알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모란에는 향기가 있으며 화중왕(花中王), 국색천향(國色天香)으로 사랑받아 왔다. 그렇다면 선덕여왕은 왜 모란은 향기가 없다고 한 걸까. 모란은 6~7세기부터 원예품종이 만들어졌으며, 그 후 다양한 색깔과 모양, 향을 가진 품종들이 개발됐다. 선덕여왕 시기 중국에서 들어온 모란은 향이 약한 초기 품종이었을 것이다. 선덕여왕이 모란에 향기가 없다고 말한 것은 스스로의 능력으로도 충분히 신라의 문화를 발전시키고, 정치적 안정을 이룰 수 있음을 선언한 것일지도 모른다. 신라 경문왕의 두건 만드는 장인이 대나무숲으로 가서 왕의 비밀을 외쳤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서 나온다. 이 일화에서 유래해 현대에 ‘~ 대나무숲’이라는 인터넷 용어가 탄생했다. 두건을 만드는 장인은 왜 하필 대나무숲으로 가서 외쳤을까. 대나무는 침엽수처럼 피톤치드를 다량 방출해 항염, 항균, 스트레스 조절 등의 효과가 있다고 한다. 어쩌면 두건 장인은 대나무숲으로 가 비밀도 외칠 겸 힐링하고 온 건 아닐까. 한편, 미추왕릉 주변의 대나무는 죽엽군의 전설을 입증하는 것 같다. 부족 국가인 이서국이 경주를 공격하자 죽엽군이 나타나 도와줬고, 미추왕릉에 대나무 잎이 쌓여 있었다는 설화가 삼국유사에 나온다. 우리나라 군대의 영관급 계급장은 대나무 잎으로 구성돼 있는데, 굳건한 기상과 절개의 의미를 담았다. 미추왕의 죽엽군도 비슷한 이유로 대나무 잎을 귀에 꽂았을 것이다. 삼국 시대에도 실크로드와 바닷길을 통해 서역 국가와 교역이 활발했으며, 많은 이민자가 정착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나와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사례는 열 명의 아들을 보고 150세가 넘도록 해로한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과 가락국 수로왕의 결합이다. 수로왕릉에 그려진 두 마리의 물고기 문양, 자손의 성씨가 허씨도 있다는 점이 서로의 문화가 조화롭게 융합했음을 알 수 있다. 문화 차이, 부부 간 갈등, 국제결혼 자녀의 차별과 같은 문제를 안고 있는 현대의 다문화 가족에 시사점을 던진다. 서민층을 위한 불교 전파를 한 원효대사가 관음보살을 못 알아보고 말실수를 한 일화에서는 그의 인간적 면모가 드러난다. 마치 벼가 익으면서 고개를 숙이듯이 아직 성숙하지 않은 원효대사를 영글지 않은 벼로 비유한 것이라고 지은이는 해석한다. 또 벼재배는 약 7000~1만년 전 동남아시아에서 시작됐으며, 한반도의 벼농사는 적어도 4000년 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을 했으나 1998년 충북 옥산면 소로리에서 1만3000~1만6000년 전 볍씨가 발견돼 벼농사의 종주국으로 기록됐다는 이야기도 소개한다. 2020년 말 집계된 전국의 보호수는 1만3864그루다.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인 7293그루가 느티나무이며, 수백 년에서 길게는 1000년 이상을 산 느티나무 노거수 19그루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느티나무는 오랫동안 살기 때문에 줄기가 굵고 치밀해 큰 건물의 기둥, 고급 가구와 식기, 불상이나 악기를 제작하는 데에도 쓰였다. 천마총이나 가야고분에서 출토된 관도 느티나무였다. 안진흥 교수는 환인이 내려온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가 당산목으로 많이 심은 느티나무라는 가능성도 제시했다. 삼국유사와 같은 고문헌에서 전통식물 지식도 찾을 수 있는데, 단군 신화에서 곰이 먹은 영쑥은 약초로 쓰이는 ‘개똥쑥’이나 ‘인진쑥’일 수 있다고 지은이는 주장한다. 중국의 투유유 박사는 개똥쑥에서 말라리아 치료제 성분을 찾아 2015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개똥쑥은 항산화 및 항균 효과와 항암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다. 이에 이 쑥을 재배하는 농가가 생기고 개똥쑥을 테마로 한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이 마련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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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96)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전라도 진포 바깥 군산바다에 나타난 진언상, 1406년 8월 11일 태종실록의 기록에 나오는 이름이다. 2017년 이맘때쯤 이 지면을 통해 소개했던 풍경이기도 하다. 그 한 장면을 다시 소환한다. 나주바다, 지금의 신안군 북쪽 언저리를 돌아 왕등도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 이른 아침이었다. 내안 방향에서 왜구들의 배가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모두 열다섯 척이었다. 조류 흐름을 타고 있던 터라 왜구의 배들이 순식간에 이물에 이르고 말았다. 대비할 틈도 없었다. 뱃전으로 뛰어오르는 왜구들을 향해 결사항전을 벌였다. 긴 칼과 삼지창이 무용지물이었다. 복부가 터지고 머리가 잘려 물속에 곤두박질치며 비명을 질러댔다. 피투성이가 되어 물에 떨어진 자들이 고물 너머로 쏜살같이 밀려났다. 들물 받은 배들이 엉키면서 지금의 고군산 관리도 깃대봉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왜구들이 함성을 지르며 깃발로 신호를 했다. 다행이랄까. 황급히 선두를 돌리는 왜구들을 뒤로 하고 뱃전의 모든 돛폭을 폈다. 앞섬을 향하여 전력 질주했다. 군산도에 이르니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은 다시 청정해졌다. 파도만이 호흡을 멈추지 못하고 갯바위에 부딪치며 헐떡댔다. 이 싸움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고작 40명이었다. 실록에 나오는 진언상은 인도네시아 사람일까? 태종실록에는 진언상을 조와국(지금의 인도네시아) 사신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조흥국 등의 연구에 의하면 태국의 사신들인 장쓰다오의 예를 들며 남중국해 및 동중국해에서 무역활동을 하던 중국 상인 즉 화교일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진언상이 처음 등장하는 1394년 조선왕조실록에 그에 관한 상세한 언급이 없는 점으로 보아 사신이라기보다는 무역상인 쪽에 비중을 두는 셈이다. 이후 1405년 진언상이 다시 조선을 찾게 되는데 사신이든 상인이든 그 성격을 명확하게 할 수 있는 근거는 약해 보인다. 진상품이라는 약재와 각종의 남방 조류, 물품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도 관건이다. 스위스의 역사학자 우르스 비테를리의 분류로는, 14세기 말-15세기 초 우리와 인도네시아 혹은 인도차이나 여러 지역들 간의 교류는 문화접촉 차원에서 끝나버려 문화관계로 발전하지 못했다고 한다. 조흥국은 이를 동중국해의 해상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해적의 위협과 조선 정부의 무관심이 가장 두드러진 요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진언상을 비롯한 동남아 해역을 누리던 이들이 조와국 즉 자바국의 사신이었을지 중국계 상인이었을지는 향후 후학들이 풀어야 할 숙제로 남겨둬야 하는 것일까. 이보다 앞선 여러 가지 문화적 유사성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해양실크로드, 남해로(南海路)를 따라 온 것들 뱃길을 통해서 인도로부터 동아시아 전반으로 전래된 불교를 사례 삼아 본다. 수많은 물질과 문화의 교류를 수반했기 때문이다. 동인도에서 불교경전을 익힌 법현(337~420)이 스리랑카를 거쳐 중국 광동성으로 가는 배를 탄다. 하지만 200여명이 승선한 배가 폭풍으로 인도네시아 자바에 표류한다. 이곳 야바제(耶婆提)가 자바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지금까지의 해석대로라면 진언상이 왔다는 나라일텐데 수마트라 동부 해안의 어느 도시라는 해석에 비중이 실리는 듯하다. 이후 다시 광동으로 향한 배가 폭풍우에 밀려 410년 산둥반도 칭저우(靑州)에 귀착한다. 나는 이 뱃길이 1394년이나 1406년 진언상이 지났던 뱃길이며 1831년부터 귀츨라프가 만주 타타르족을 만나러 지나갔던 뱃길이라고 생각한다. 심재관의 연구에 의하면 4세기에서 6세기경 사이에는 푸난-광주-남경루트 즉, 인도-스리랑카-푸난-광주-남경 항로를 이용하는 승려들이 늘어난다. 이 항로가 법현의 항로와 같다. 현장과 동시대인이었던 의정(義淨, 635~713)은 해로를 이용해 인도를 왕복한다. 광주에서 출발해 수마트라 팔렘방을 거쳐 인도로 들어갔다가 20여년 후 다시 동일한 해로를 통해 귀환한다. 강희정의 연구에 의하면, 남해로(南海路)로 일컬어지는 해상 실크로드는 한 번에 실어 나를 수 있는 물동량이 육로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방대했기 때문에 역사적인 기복에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확대되었다. 불교과련 물품 즉 불상이나 보살상, 사리탑, 기타 불구뿐만 아니라 향로에 피우는 향, 음식, 약재를 만드는데 쓰는 각종 식물, 불교관련 용품의 재료가 되는 광물질, 정향, 설탕, 용뇌, 후추, 침향 등의 식물, 대모, 비취조, 앵무새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진언상의 기록에 나오는 항목들과 비교해 봐도 비슷한 것들이 많다. 특히 '삼국유사' 탑상편에 나오는 바, 인도에서 아육왕(Asoka)이 황철 5만7천근과 금 3만금을 인연 있는 땅으로 실어 보냈고 이것이 마침내 경주 땅에 이르러 황룡사 장육존상을 만드는 재료로 쓰였다는 것 아닌가. 이처럼 철광석이나 구리와 같은 광물질이 이 시기 중요한 해상 교역물품이었다는 것이다. 445년 베트남 중부에 있던 참족의 나라 임읍에서 금 만근, 은 10만근, 동 30만금을 중국에 조공했다는 기록도 인용하고 있다. 2004~2005년 사이에 인도네시아 치르본(Cirebon)에서 발굴된 난파선에서 주석괴, 납괴 등 여러 종류의 광물 덩어리가 다량 발굴된 것도 이와 관련하여 해석하고 있다. 기록되지 않은 동남아간 해상교류의 흔적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뜻이니 불교가 수입되었듯 이들 교역품도 한반도와 거래되었을 것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아직은 오리무중, 시간을 거슬러 옛 자바에서 온 편지를 읽으려는데 무심한 동남풍만 내 마당 가득하다. 슈리비자야에서 황룡사까지 강희정은 동남아시아 교역루트를 황룡사 설화와 연결시킨다. 단순한 인연설화가 아니라 그 이면에는 배를 통해 특정한 물질이 오고갔고 그 가운데 일부는 불교문화를 구성하는 물질적인 요소였다는 것이다. 기록에 나오는 433년의 가라단(呵羅單, 자바 혹은 Kelantna 추정)이나 435년 사파파달(闍婆婆達, 자바 추정)의 사절도 사례 중 하나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지금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해서 신라 사람들이 동남아의 여러 나라와 그 산물에 대해 무지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각주로 빼서 기록해두긴 했지만 신라인들이 국제항구로 발돋음 하던 천주와 광주 등지에서 동남아시아 상인들과 활발하게 교역했을 가능성들을 열어두고 있다. 이들 교역의 중심에는 신라초, 신라방 등이 있는 동중국의 여러 포구들뿐만 아니라 불교의 중심지이자 무역의 중심지였던 슈리비자야 즉 지금의 말라카 해협을 둘러싼 말레이시아 남부와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자바섬 등이 있다. 인도에서 한반도까지의 물길을 고려해보면 구법승들이 자연스럽게 수리비자야를 들렀을 것이다. 이주형의 논의를 인용한 조흥국은 불교의 동아시아 전래 이후 경전을 얻거나 불적을 답사하기 위해 인도로 떠난 아시아 구법승의 숫자는 대략 695명이라고 주장한다. 이중 이름이 알려진 경우만 해도 165명에 이른다.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신라승 혜초(慧超, 704~780)도 인도로 출국할 때는 해로를 이용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고인돌 등의 고고유적, 벼농사권 등 우연이나 자연환경의 영향으로 치부되는 유사성들까지 언급하지 않더라도 말라카해협을 포함한 인도네시아와 한반도와의 물길교류는 충분히 검토 가능한 항목이다. 곰곰이 생각해본다. 슈리비자야에서 온 광물과 종교가 황룡사를 만들었듯이 오늘날 또 무엇이 서로 교류되어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내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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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93)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전라도 진포 바깥 군산바다에 나타난 진언상, 1406년 8월 11일 태종실록의 기록에 나오는 이름이다. 2017년 이맘때쯤 이 지면을 통해 소개했던 풍경이기도 하다. 그 한 장면을 다시 소환한다. 나주바다, 지금의 신안군 북쪽 언저리를 돌아 왕등도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 이른 아침이었다. 내안 방향에서 왜구들의 배가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모두 열다섯 척이었다. 조류 흐름을 타고 있던 터라 왜구의 배들이 순식간에 이물에 이르고 말았다. 대비할 틈도 없었다. 뱃전으로 뛰어오르는 왜구들을 향해 결사항전을 벌였다. 긴 칼과 삼지창이 무용지물이었다. 복부가 터지고 머리가 잘려 물속에 곤두박질치며 비명을 질러댔다. 피투성이가 되어 물에 떨어진 자들이 고물 너머로 쏜살같이 밀려났다. 들물 받은 배들이 엉키면서 지금의 고군산 관리도 깃대봉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왜구들이 함성을 지르며 깃발로 신호를 했다. 다행이랄까. 황급히 선두를 돌리는 왜구들을 뒤로 하고 뱃전의 모든 돛폭을 폈다. 앞섬을 향하여 전력 질주했다. 군산도에 이르니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은 다시 청정해졌다. 파도만이 호흡을 멈추지 못하고 갯바위에 부딪치며 헐떡댔다. 이 싸움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고작 40명이었다. 실록에 나오는 진언상은 인도네시아 사람일까? 태종실록에는 진언상을 조와국(지금의 인도네시아) 사신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조흥국 등의 연구에 의하면 태국의 사신들인 장쓰다오의 예를 들며 남중국해 및 동중국해에서 무역활동을 하던 중국 상인 즉 화교일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진언상이 처음 등장하는 1394년 조선왕조실록에 그에 관한 상세한 언급이 없는 점으로 보아 사신이라기보다는 무역상인 쪽에 비중을 두는 셈이다. 이후 1405년 진언상이 다시 조선을 찾게 되는데 사신이든 상인이든 그 성격을 명확하게 할 수 있는 근거는 약해 보인다. 진상품이라는 약재와 각종의 남방 조류, 물품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도 관건이다. 스위스의 역사학자 우르스 비테를리의 분류로는, 14세기 말-15세기 초 우리와 인도네시아 혹은 인도차이나 여러 지역들 간의 교류는 문화접촉 차원에서 끝나버려 문화관계로 발전하지 못했다고 한다. 조흥국은 이를 동중국해의 해상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해적의 위협과 조선 정부의 무관심이 가장 두드러진 요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진언상을 비롯한 동남아 해역을 누리던 이들이 조와국 즉 자바국의 사신이었을지 중국계 상인이었을지는 향후 후학들이 풀어야 할 숙제로 남겨둬야 하는 것일까. 이보다 앞선 여러 가지 문화적 유사성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해양실크로드, 남해로(南海路)를 따라 온 것들 뱃길을 통해서 인도로부터 동아시아 전반으로 전래된 불교를 사례 삼아 본다. 수많은 물질과 문화의 교류를 수반했기 때문이다. 동인도에서 불교경전을 익힌 법현(337~420)이 스리랑카를 거쳐 중국 광동성으로 가는 배를 탄다. 하지만 200여명이 승선한 배가 폭풍으로 인도네시아 자바에 표류한다. 이곳 야바제(耶婆提)가 자바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지금까지의 해석대로라면 진언상이 왔다는 나라일텐데 수마트라 동부 해안의 어느 도시라는 해석에 비중이 실리는 듯하다. 이후 다시 광동으로 향한 배가 폭풍우에 밀려 410년 산둥반도 칭저우(靑州)에 귀착한다. 나는 이 뱃길이 1394년이나 1406년 진언상이 지났던 뱃길이며 1831년부터 귀츨라프가 만주 타타르족을 만나러 지나갔던 뱃길이라고 생각한다. 심재관의 연구에 의하면 4세기에서 6세기경 사이에는 푸난-광주-남경루트 즉, 인도-스리랑카-푸난-광주-남경 항로를 이용하는 승려들이 늘어난다. 이 항로가 법현의 항로와 같다. 현장과 동시대인이었던 의정(義淨, 635~713)은 해로를 이용해 인도를 왕복한다. 광주에서 출발해 수마트라 팔렘방을 거쳐 인도로 들어갔다가 20여년 후 다시 동일한 해로를 통해 귀환한다. 강희정의 연구에 의하면, 남해로(南海路)로 일컬어지는 해상 실크로드는 한 번에 실어 나를 수 있는 물동량이 육로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방대했기 때문에 역사적인 기복에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확대되었다. 불교과련 물품 즉 불상이나 보살상, 사리탑, 기타 불구뿐만 아니라 향로에 피우는 향, 음식, 약재를 만드는데 쓰는 각종 식물, 불교관련 용품의 재료가 되는 광물질, 정향, 설탕, 용뇌, 후추, 침향 등의 식물, 대모, 비취조, 앵무새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진언상의 기록에 나오는 항목들과 비교해 봐도 비슷한 것들이 많다. 특히 '삼국유사' 탑상편에 나오는 바, 인도에서 아육왕(Asoka)이 황철 5만7천근과 금 3만금을 인연 있는 땅으로 실어 보냈고 이것이 마침내 경주 땅에 이르러 황룡사 장육존상을 만드는 재료로 쓰였다는 것 아닌가. 이처럼 철광석이나 구리와 같은 광물질이 이 시기 중요한 해상 교역물품이었다는 것이다. 445년 베트남 중부에 있던 참족의 나라 임읍에서 금 만근, 은 10만근, 동 30만금을 중국에 조공했다는 기록도 인용하고 있다. 2004~2005년 사이에 인도네시아 치르본(Cirebon)에서 발굴된 난파선에서 주석괴, 납괴 등 여러 종류의 광물 덩어리가 다량 발굴된 것도 이와 관련하여 해석하고 있다. 기록되지 않은 동남아간 해상교류의 흔적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뜻이니 불교가 수입되었듯 이들 교역품도 한반도와 거래되었을 것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아직은 오리무중, 시간을 거슬러 옛 자바에서 온 편지를 읽으려는데 무심한 동남풍만 내 마당 가득하다. 슈리비자야에서 황룡사까지 강희정은 동남아시아 교역루트를 황룡사 설화와 연결시킨다. 단순한 인연설화가 아니라 그 이면에는 배를 통해 특정한 물질이 오고갔고 그 가운데 일부는 불교문화를 구성하는 물질적인 요소였다는 것이다. 기록에 나오는 433년의 가라단(呵羅單, 자바 혹은 Kelantna 추정)이나 435년 사파파달(闍婆婆達, 자바 추정)의 사절도 사례 중 하나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지금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해서 신라 사람들이 동남아의 여러 나라와 그 산물에 대해 무지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각주로 빼서 기록해두긴 했지만 신라인들이 국제항구로 발돋음 하던 천주와 광주 등지에서 동남아시아 상인들과 활발하게 교역했을 가능성들을 열어두고 있다. 이들 교역의 중심에는 신라초, 신라방 등이 있는 동중국의 여러 포구들뿐만 아니라 불교의 중심지이자 무역의 중심지였던 슈리비자야 즉 지금의 말라카 해협을 둘러싼 말레이시아 남부와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자바섬 등이 있다. 인도에서 한반도까지의 물길을 고려해보면 구법승들이 자연스럽게 수리비자야를 들렀을 것이다. 이주형의 논의를 인용한 조흥국은 불교의 동아시아 전래 이후 경전을 얻거나 불적을 답사하기 위해 인도로 떠난 아시아 구법승의 숫자는 대략 695명이라고 주장한다. 이중 이름이 알려진 경우만 해도 165명에 이른다.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신라승 혜초(慧超, 704~780)도 인도로 출국할 때는 해로를 이용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고인돌 등의 고고유적, 벼농사권 등 우연이나 자연환경의 영향으로 치부되는 유사성들까지 언급하지 않더라도 말라카해협을 포함한 인도네시아와 한반도와의 물길교류는 충분히 검토 가능한 항목이다. 곰곰이 생각해본다. 슈리비자야에서 온 광물과 종교가 황룡사를 만들었듯이 오늘날 또 무엇이 서로 교류되어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내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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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현의 울림, 최혜림의 아쟁 ‘WITH 양승환’서울돈화문국악당은 오는 2월 14일(화) 오후 7시 30분, ‘서울돈화문국악당 2023 공동기획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최혜림의 아쟁 'WITH 양승환’ 공연을 선보인다. 최혜림은 2010년 미국 오리곤 대학(University of Oregon)에서 독주회를 시작으로 2010년에는 한국음악앙상블 '실크로드'의 멤버로 제4회 21C 한국음악프로젝트 21C '아리랑상'을 수상하였다. 그 후, 2020년 최혜림의 아쟁 ‘Sensibility’ 독주회를 통해 아쟁이 가진 고유의 성음과 아쟁 사운드의 다양한 표현력,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를 토대로 2021년 최혜림의 아쟁 'Sensibility’ 음반을 발표하며 음악의 섬세한 표현과 해석을 보여주었으며, 현재 국립국악원 창작악단 단원으로 활동하며 정진하고 있다. 최혜림은 2021년 최혜림의 아쟁 'Sensibility’ 음반을 발표하며, 전통과 창작 연주를 기반으로 아쟁이 가진 색감을 선명하게 표현하고자 했다면, 이번 ‘최혜림의 아쟁 <WITH 양승환> 공연에서는 전통음악을 비롯하여 아쟁을 통해 다양한 가능성을 발굴하고, 아쟁의 음색과 현대기법에 대한 연구 등의 다양한 시도를 통해 아쟁의 매력을 널리 알릴 예정이다. ‘최혜림의 아쟁 <WITH 양승환>’은 양승환 작곡가와 협업으로 새롭게 개작한 '별빛명상Ⅱ', 'Intertwined Ⅱ', '연(緣)'과 비올라와 아쟁의 2중주곡, 다양한 선법을 이용한 새로운 산조 형태의 초연 곡들을 선보일 예정이다. 기존 호흡을 맞춰왔던 연주자들과 함께 다양한 전통음악의 장르를 결합하여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였으며, 아쟁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고자 하는 작품들로 구성하였다. 아쟁을 중심으로 다양한 악기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앙상블의 정수를 선보인다. 서울돈화문국악당의 ‘공동기획 프로젝트’는 예술가가 안정적인 공연 진행을 할 수 있도록 극장 대관료를 무상으로 제공하며 공연과 관련된 인력지원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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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의 '박엽평전'....칼을 찬 어느 문인을 기억하며이 책은 한 저널리스트가 조선 광해군 때의 문신 박엽(朴燁)이 인조반정 이후 ‘파렴치범’으로 몰려 처형된 사건에 관한 진실을 찾아 나선 행적과 기록이다. 저자 이동식은 관찬 사료와 야사·야담은 물론 개인 문집, 후세의 기록과 평가 등 사료를 두루 섭렵하면서 ‘역사’라고 하는 ‘거대한 기억’ 속에서 사실과 진실을 마주하고자 했다. 역사란 문자화된 기억이다. 즉 한 사회가 겪었던 일들에 대한 공식화된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기억하느냐에 따라 역사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역사는 또한 선택된 기억이다. 문자를 지배하는 자들, 결국 힘 있는 자들이 자기의 구미에 맞는 기억만을 선택하여 문자로 남길 것이기 때문이다(김세걸, ‘기억 전쟁의 미로찾기’). 사후 40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박엽을 소환한 이유는 무엇인가? 저자는 작금의 정치 현실에 빗대어, "역사의 죄인으로 처형된 한 문인 장수의 진정한 면모를 우리가 기억하고, 그의 억울한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정치행태를 거울로 삼아 박엽 이후의 정묘, 병자호란과 같은 고통과 치욕을 우리 국민이 다시 겪지 않을 수 있다면 긴 탐색과 고민의 시간이 보상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박엽을 ‘조선의 만리장성’으로 비유한 선인들의 탄식과 맥을 같이 하는 결론이기도 하다. 예컨대, 조선 후기 《매산집》을 저술한 홍직필은 "정묘, 병자 두 호란을 겪고 나서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박엽의 처형으로 스스로 만리장성을 허물었다고 통탄했다.”라고 전한다. 저자는 "박엽에 관한 기록들을 다시 검토하고 분석해서 나름대로 결론을 얻었다. 이 책을 통해 역사의 죄인으로 처형된 한 문인 장수의 진정한 면모를 현대의 우리가 기억하고, 그의 억울한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정치행태를 거울로 삼아 박엽 이후의 정묘, 병자호란과 같은 고통과 치욕을 우리 국민이 다시 겪지 않을 수 있다면 지난 시간의 긴 탐색과 고민의 시간이 보상받을 것으로 생각한다"라고 분석했다. 박엽 (朴燁, 1570~1623)은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숙야(叔夜)이고, 1597년(선조 30)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1601년 정언(正言)이 되고, 이어 병조정랑·직강(直講)을 역임하고 해남 현감 등을 지냈다. 그 뒤 광해군 때 함경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광해군의 뜻에 따라 성지(城池)를 수축해 북변의 방비를 공고히 하였다. 그리고 황해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평안도 관찰사가 되어 6년 동안 규율을 확립하고 여진족의 동정을 잘 살펴 국방을 튼튼히 해 외침을 당하지 않았다. 당시의 권신 이이첨(李爾瞻)을 모욕하고도 무사하리만큼 명망이 있었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 뒤, 광해군 아래에서 심하(深河)의 역(役)에 협력하고, 부인이 세자빈의 인척이라는 이유로 박엽을 두려워하는 훈신들에 의해 학정의 죄로 평양 임지에서 처형되었다. 저자 이동식(李東植)은 1953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서울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했다. 1977년부터 2013년까지 36년간 KBS에 재직하면서 문화전문기자로 이름을 날렸으며, 사회부 기자, 문화부 차장, 북경특파원, 런던지국장을 거쳐 보도제작국장, 정책기획본부장, 해설위원실장, 부산총국장 등을 역임했다. 1984년 백남준을 우리나라에 소개하고 이우환, 이응로, 윤이상 등 문화예술인들을 다큐멘터리로 소개했으며, 중국 실크로드를 처음으로 취재해 방송하기도 했다. 저서로 《온계이해평전》《책바다 무작정 헤엄치기》《천안문을 열고 보니》《길이 멀어 못 갈 곳 없네》《찔레꽃과 된장》《우리 음악 어디 있나》《아니되옵니다》《숨 좀 쉬어요》《거문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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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속극박물관, ‘K-기악과 실크로드’ 심포지엄 개최한국민속극박물관(관장 심하용)은 민속과 예술연구지 서낭당 ‘K-기악과 실크로드’ 발행을 기념하며 학술 심포지엄을 충남문화재단(대표이사 김현식)의 후원으로 11월 12일 오후 2시 박물관 교육실에서 개최한다.우리나라에서 ‘기악(伎樂)’은 흔히 ‘백제 시대의 가면극’을 지칭하지만, 원래는 대승불교가 형성되면서 자연스럽게 발생한 ‘악기 연주와 춤’이 합한 예능을 의미하는 천축(인도)의 단어이다. 불교는 육상과 해상의 ‘실크로드’를 통해서 전파됐는데, 이때 기악도 함께 전파된 것이다.이번 책의 저자인 구중회 공주대학교 명예 교수는 기악의 전파로인 육상 실크로드와 해상 실크로드를 답사하며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중국과 일본의 선행 연구를 소개할 뿐만 아니라, ‘백제 기악’에 머무르고 있는 우리나라의 기악 연구의 지평선을 넓히는 동시에 현시대와 미래에 걸맞은 ‘기악’의 세계화를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K-기악’이라 이름을 붙인 것이다.학술 심포지엄 K-기악과 실크로드에서는 구중회 교수의 주제 강연에 이어 청주대학교 손대환 교수와 대화 및 참가자들의 자유 토론이 있을 예정이다.이날 참가자들에게는 이번에 발행되는 K-기악과 실크로드가 증정될 예정이며, 페이스북 라이브를 통해 생중계된다.구중회 교수는 "공주, 부여 등 백제권역의 브랜드 콘텐츠 상품 개발이 꼭 필요하다”라며 "이를 통해 지역의 문화와 경제 활성화가 이루어질 수 있고, 백제의 한류 문화 상품으로 해외에 보급해 후학 연구자들과 문화 예술인들이 그 위상을 떨칠 수 있는 콘텐츠를 개발하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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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콘텐츠대상 스토리부문 시상…대상 박서은 작가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이 한류 콘텐츠의 미래를 이끌 창작이야기 15편을 발굴했다. 문체부와 콘진원은 15일 오후 5시 서울 강남구 인터컨티넨탈 서울코엑스에서 ‘2022 콘텐츠대상 스토리부문’ 시상식을 열고 수상작 15편을 소개한다.‘대한민국 스토리 공모대전’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해 올해로 14회를 맞은 ‘대한민국 콘텐츠대상 스토리부문’은 ‘태양의 후예(드라마)’, ‘궁극의 아이(소설)’, ‘더파이브(웹툰)’, ‘조선의 등 굽은 정원사(소설)’ 등 우수한 콘텐츠 원작을 발굴해 낸 국내 최대 규모 이야기 부문 정부 공모전이다.매년 최고 경쟁률을 갱신하며 인기 작가 등용문으로 자리잡았다. 올해는 역대 최고인 111대 1의 경쟁률로, 작품 1676편이 각축을 벌였다. 문체부와 콘진원은 예심을 통해 202편을 가려낸 후 본심과 최종심을 거쳐 수상작 15편을 선정했다. 이날 시상식에서 대상(대통령상 1점)과 최우수상(문체부 장관상 4점), 우수상(콘진원장상 10점)을 수여한다. 대상은 박서은 작가의 ‘수련으로 해금 인샬라’가 차지했다. 이 작품은 고려 여인으로 태어난 수련이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실크로드를 따라 낯선 이국땅 아라비아에서 거상으로 성공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심사위원들은 "배경, 인물, 줄거리의 구성이 탄탄하고 그 설정이 참신하며, 극의 완성도가 높아 여러 분야로 확장성이 높은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또한 수상작이 콘진원 주관 사업 연계 사업에 지원하거나 수상 작가가 스토리창작센터에 입주하는 경우 가산점을 부여하고, 사업화 계약을 체결하면 해당 작품에 대한 홍보·마케팅 등도 지원할 계획이다.문체부 관계자는 "이야기는 콘텐츠 산업의 뿌리이자 원천”이라며 "앞으로도 깊은 창작의 샘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끊임없이 샘솟을 수 있도록 아낌없이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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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속극박물관, ‘K-기악과 실크로드’ 심포지엄한국민속극박물관은 민속과 예술연구지 서낭당 ‘K-기악과 실크로드’ 발행을 기념하며 학술 심포지엄을 충남문화재단(대표이사 김현식)의 후원으로 11월 12일 오후 2시 박물관 교육실에서 개최한다. 우리나라에서 ‘기악(伎樂)’은 흔히 ‘백제 시대의 가면극’을 지칭하지만, 원래는 대승불교가 형성되면서 자연스럽게 발생한 ‘악기 연주와 춤’이 합한 예능을 의미하는 천축(인도)의 단어이다. 불교는 육상과 해상의 ‘실크로드’를 통해서 전파됐는데, 이때 기악도 함께 전파된 것이다. 이번 책의 저자인 구중회 공주대학교 명예 교수는 기악의 전파로인 육상 실크로드와 해상 실크로드를 답사하며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중국과 일본의 선행 연구를 소개할 뿐만 아니라, ‘백제 기악’에 머무르고 있는 우리나라의 기악 연구의 지평선을 넓히는 동시에 현시대와 미래에 걸맞은 ‘기악’의 세계화를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K-기악’이라 이름을 붙인 것이다. 학술 심포지엄 K-기악과 실크로드에서는 구중회 교수의 주제 강연에 이어 청주대학교 손대환 교수와 대화 및 참가자들의 자유 토론이 있을 예정이다. 이날 참가자들에게는 이번에 발행되는 K-기악과 실크로드가 증정될 예정이며, 페이스북 라이브를 통해 생중계된다. 구중회 교수는 "공주, 부여 등 백제권역의 브랜드 콘텐츠 상품 개발이 꼭 필요하다”라며 "이를 통해 지역의 문화와 경제 활성화가 이루어질 수 있고, 백제의 한류 문화 상품으로 해외에 보급해 후학 연구자들과 문화 예술인들이 그 위상을 떨칠 수 있는 콘텐츠를 개발하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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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아시아 전통 합주의 흐름(김중현)한국과 아시아의 음악인들은 1993년 '오케스트라 아시아' 창단을 시작으로 2008년 '한-아세안 전통음악 오케스트라', 2014년 '실크로드 오케스트라' 등 각국의 전통악기로 구성한 새로운 형태의 오케스트라를 만들고 활발한 상호 음악교류 활동을 이어 가고 있다. 지난 100여 년 간 아시아 전통음악은 서양음악의 영향으로 많은 변화과정을 경험하였다. 특히 근·현대시기에 아시아 각국의 전통악기를 중심으로 전통관현악단이 탄생하였는데, 주로 서양에서 발달한 오케스트라의 연행방식을 모방한 형태로 편성되었다. 서양의 오케스트레이션을 모방한 아시아의 전통음악 관현악단은 아시아의 근·현대 이전의 전통음악 연행방식에서는 흔치 않았던 지휘와 작곡 개념을 도입하기 시작하였다. 그 외에도 다양한 변화가 나타났는데, 한국의 경우 연주자들이 전통음악의 5음 음계 대신 평균율을 의식하는 음률감으로 변화하였다. 관현악단 연주형태에서는 악기편성, 연주자의 수, 악기배치 등 다양한 변화가 있었다. 이렇듯 아시아 각국 전통관현악단들은 서양음악의 영향으로 전통 방식이 아닌 서양 오케스트라를 모방한 서양 미학적 관점과 현대화를 위한 새로운 시도를 하였다. 아시아 각 지역에는 다양한 형태의 궁중과 민간 관현악단들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아시아 각국의 전통관현악단은 서양에서 발달한 오케스트라의 연행방식을 도입한 형태로 앙상블을 만들었으며, 작곡과 지휘 개념을 도입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아시아 전통관현악은 각국에 서양음악이 유입된 이후 그영향으로 서양식 관현악합주 형태를 띠었는데, 이는 자국의 전통양식과 합주형태의 계승보다 서양의 합주형태를 모방한 것에 더 가까웠다. 이렇듯 아시아의 근·현대적 전통관현악단이 등장하였으며, 그 등장 시기는 나라마다 차이가 있다. 아시아 각국의 근·현대적 전통관현악단은 자국의 전통관현악을 계승한 새로운 음악적 산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현재 전통관현악은 시대의 변화와 흐름에 맞추어 새로운 음악문화를 창조해 나가는 동시에 자국의 전통음악을 계승 발전하고자 하는 흐름이 이어지면서 음악적 변화와 성장에 중요한 기반이 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아시아 각국이 연대하여 다국가 ‘아시아 전통악기 오케스트라’를 형성하였다. ‘아시아 전통악기 오케스트라’는 아시아 지역 국가들이 모여 자국의 전통악기를 사용하고 서양의 오케스트라 형태를 모방하여 관현악 편성으로 구성한 악단을 의미한다. ‘아시아 전통악기 오케스트라’는 20세기 후반 아시아 음악인들이 상호 간의 연대를 통해 만든 다국적 전통악기 합주형태를 의미하고 통칭하는 용어로 필자가 새롭게 명칭을 정하였다. 특히 본 책에서는 ‘아시아 전통악기 오케스트라’는 국악관현악과 아사아 소통하며 활동을 지속하고 있는 한·중·일 '오케스트라 아시아', '한-아세안 전통음악 오케스트라', '실크로드 오케스트라'를 주요 대상으로 기술하였다. 본 책에서는 근·현대에 전개된 아시아 각국의 전통관현악단이 ‘아시아 전통악기 오케스트라’로 연합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양상이 펼쳐지는지 그 형성과정과 음악적 특징을 분석하였다. 아울러 20세기 후반 아시아 음악인들이 연합하여 새로운 음악문화를 만들고 활동한 과정이 인류음악사 속에서 갖는 의미를 살펴보고 조명해보고자 한다. 본 책에서 살펴볼 논의와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아시아 각국의 전통관현악은 서양음악 수용을 통해 어떠한 형태로 변화하였는가를 살펴보았다. 둘째, ‘아시아 전통악기 오케스트라’ 형성과정에서 나타난 변화가 무엇인지 아시아 각국에서 서양음악을 받아들이고, 또 ‘아시아 전통악기 오케스트라’가 만들어졌을 때 제기되었던 문제와 해결 과정은 어떠하였는지 살펴보았다. 이를 통하여 '오케스트라 아시아', '한-아세안 전통음악 오케스트라', '실크로드 오케스트라'의 세 가지 유형의 ‘아시아 전통악기 오케스트라’가 음악 문화적 형성과정에서 경험한 특징을 살펴보았다. 셋째, ‘아시아 전통악기 오케스트라’ 활동을 통해 각국의 전통악기들의 음악적 융합이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새롭게 선보인 음악과 작품이 어떠한 특징을 지니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넷째, ‘아시아 전통악기 오케스트라’ 활동을 살펴본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다문화적 관점과 상호주의적 관점에서 음악문화적 의미를 찾아보았다. 제2장은 근·현대 아시아 각국 전통관현악의 전개양상을 살펴보겠다. 한국의 국악관현악, 중국의 민족관현악, 일본의 현대 방악의 생성과 변천과정을 고찰하고자 한다. 각국의 악기 편성과 창작곡의 연주 경향, 단체 등을 살펴보고, 아시아 각국 전통관현악의 전개양상을 한국, 중국, 일본, 동남아 순으로 분석하였다. 또한 '오케스트라 아시아' 창단의 모체가 되었던, 한국의 '중앙국악관현악단', 중국의 '중앙민족악단', 일본의 '일본음악집단'의 공연자료 인쇄물 및 회의 자료 등을 함께 살펴보기로 한다. 그리고 동남아시아를 포함한 기타 아시아 국가들은 문헌을 통해 아시아 각국의 전통악기합주에 관한 내용을 살펴볼 것이다. 특히 한국, 중국, 일본의 전개과정에서 나타난 음률 체계, 악기 편성, 악기 개량에 대하여 파악하였다. 제3장의 ‘아시아 전통악기 오케스트라’의 형성과정은 '오케스트라 아시아', '한-아세안 전통음악 오케스트라', '실크로드 오케스트라'의 형성과정을 검토하고 각각의 오케스트라의 형성 배경과 활동을 살펴보았다. 먼저 형성 배경은 추진 주체에 따라 정부주도, 민간주도로 구분하여 추진 사례를 살펴보았다. 다음으로 아시아의 연합오케스트라로서 각국이 추구하는 목적이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악기편성과 작곡, 연주 공연에서 나타난 협의 과정, 진행 과정을 파악하고 그 특징을 논의해보도록 하겠다. 그리고 음악 활동과 특징을 실제 공연과 창작된 악곡의 분석 및 음악작품의 특징을 파악하고 음악 문화적 의미를찾는데 주안점을 두고 살펴보았다. 제4장은 아시아 각국 전통관현악의 전개양상과 ‘아시아 전통악기 오케스트라’ 형성과정 검토 및 악곡의 특징 분석을 통해 나타난 음악 문화적 의미를 살펴볼 것이다. 다문화주의와 문화상호주의적 관점에서 그 의미를 분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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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우즈베키스탄 문화유산청과 문화유산 국제개발협력사업 업무협약 체결문화재청(청장 최응천)은 8월 4일 오후 2시(현지 시각)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서 *우즈베키스탄 문화유산청(청장 바호디르 압디카리모프)과 문화유산 국제개발협력사업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하였다. 문화재청(수행기관 한국문화재재단)은 이번 협약을 계기로 올해부터 오는 2026년까지 5년에 걸쳐 우즈베키스탄 문화유산청 소속 사마르칸트 고고학연구소(소장 사이도프 무민혼)와 함께 사마르칸트 *크즈르테파 유적에 대한 공동발굴조사, 사마르칸트권 문화유산의 관광자원화 지원, 보존관리센터 구축 사업 등을 추진한다. 이번 양해각서 체결에 앞서 지난 6월 28일 한국문화재재단(이사장 최영창)은 사마르칸트 고고학연구소와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권 문화 관광자원 개발 역량 강화 사업’ 추진을 위한 협의의사록(RD/Record of Discussion)을 온라인으로 체결했다. 3일에는 타슈켄트에서 최영창 한국문화재재단 이사장, 공달용 문화재청 국제협력과 연구관 등 문화재청 관계자와 우즈베키스탄 부총리 겸 관광문화유산부 장관인 아지즈 압두하키모브(Aziz A.Abukhakimv)가 참여한 가운데 공식회담을 가져 양국간 문화유산 분야 협력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논의하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아지즈 압두하키모브 장관은 "우즈베키스탄 문화유산 보존을 위해 한국의 선진 경험과 기술을 지속적으로 전수해 달라”고 요청했다. 우즈베키스탄의 대표적인 역사 문화유적지인 사마르칸트는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이다. 고대부터 동서양을 연결해 온 실크로드의 중심지이며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교차된 역사도시라는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 2001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곳에 있는 *아프로시압 박물관에는 7세기 바르후만 왕의 즉위식에 참석한 고구려 사절단 모습이 그려진 궁전벽화가 소장되어 있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문화재청은 풍부한 문화유산 조사·발굴 경험과 최첨단 디지털 기술을 종합적으로 투입하여 우즈베키스탄 문화유산의 조사·발굴과 디지털 복원에 임할 계획이다. 또한, 앞으로도 적극행정과 정부혁신의 일환으로 문화유산 국제개발협력사업을 통해 국제사회의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달성에 부응하고, 활발한 문화유산 외교를 실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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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팝 콘서트로 한-카자흐스탄 상호 문화교류의 해 활짝 연다오는 18일(현지시간) 카자흐스탄 누르술탄에서 K팝 공연 '안녕! 케이팝 페스타'가 열린다.문화체육관광부와 주카자흐스탄한국문화원,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은 이날 오후 4시 누르술탄 센트럴 콘서트홀에서 케이팝 페스타 공연을 갖고 '2022~2023 한-카자흐스탄 상호 문화교류의 해' 시작을 알린다고 17일 밝혔다.'시크릿가든' 등 대표 한류 드라마 삽입 음악(OST)을 부른 가수 백지영, 2017 아스타나 엑스포에서 '한국의 날' 기념 공연을 펼쳐 열렬한 환호를 받았던 K팝 그룹 '하이라이트', '여자친구' 출신의 '비비지(VIVIZ)'가 무대를 가득 채운다.백지영은 '그 여자'를 비롯해 '총 맞은 것처럼'과 '내 귀에 캔디' 등으로 감동과 흥을 동시에 선사한다. '비비지'는 '여자친구' 활동 당시 큰 인기를 끌었던 '너 그리고 나', '밤'부터 최근 신곡 '밥밥(BOP BOP)' 등을 통해 매력을 뽐낸다. 특히 무대 의상으로 한복을 입어 현지인들에게 한복의 매력도 알린다.하이라이트는 '데이드림', '픽션', '얼굴 찌푸리지 말아요' 등 인기곡을 통해 5년 전보다 더욱 뜨겁게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계획이다. 이어 모든 출연진이 함께 '하이라이트'의 '아름다운 밤이야'를 부르며 공연의 마지막을 장식한다.케이팝 공연 외에도 한국과 카자흐스탄 양국에서 '상호 문화교류의 해'를 기념하는 문화교류 행사들이 펼쳐진다.카자흐스탄에서 ▲박대성 화백 한국화 전시(6월24일~8월14일·누르술탄 국립중앙박물관) ▲조수미 초청 클래식 공연(9월·누르술탄 아스타나 오페라 발레극장) 등이, 한국에서 ▲아스타나발레단 방한 공연(7~12월 중·한국) 등이 예정돼 있다.한국과 카자흐스탄은 2019년 양국 수교 30주년을 기념해 2022년에 '상호 문화교류의 해'를 추진키로 합의했으며, 이에 따라 지난 5월 '2022~2023 한-카자흐스탄 상호 문화교류의 해' 업무협약을 체결했다.문체부 관계자는 "카자흐스탄은 중앙아시아의 중심국가로서 동서양을 연결해주는 '실크로드'의 중추"라며 "양국간 문화 실크로드를 구축해 교류를 활성화하고 서로에 대한 신뢰와 이해를 더욱 깊게 만들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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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인 60% 목숨 잃은 흑사병 진원지는 '키르기스스탄'1346년~1353년 사이 중세 유럽 인구의 60%에 달하는 5000만명을 사망케 한 흑사병이 처음 발생한 곳이 지금의 키르기스스탄 지역인 것으로 과학자들이 밝혀냈다고 미국 뉴욕타임스(NYT)와 월스트리트저널(WSJ)이 15일(현지시간) 보도했다.독일 막스 플랑크 진화인류학 및 인류 역사학 연구소의 볼프강 하크와 요하네스 크라우스, 스코틀랜드 스털링대 필립 슬라빈 교수 등이 네이처지 최근호에 이같은 연구결과를 발표했다.이들은 중국 서부 키르기스스탄 수도 비시케크 남쪽 티안샨 산악지대에서 발견된 치아의 유전자를 분석해 흑사병이 1338~1339년에 발병했음을 밝혔다. 흑사병은 이 지역에 살던 교역 종사자 소수에서 발병했으나 8년 뒤 유라시아 전역으로 확산해 감염자의 60%가 사망했다.감염된 사람 몸에 흑색 반점이 생기는 것을 본따 명명된 흑사병은 설치류에 기생하는 벼룩이 옮기는 예르시니아 페스티스라는 박테리아가 원인균이다. 현재도 호주 대륙을 제외한 전세계에서 발병하고 있다. 다만 위생상태가 개선되면서 감염은 매우 드물게 나타나며 항생제로 쉽게 치료된다.존스 홉킨스 대 의료사학자 메리 피셀은 14세기의 흑사병은 인류역사에서 흑사병 박테리가가 크게 유행한 두번째 사례라고 밝혔다. 6세기 유스티아누스 황제 시대에도 유행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세 유럽의 흑사병은 인류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감염병으로 여겨진다.이탈리아 플로렌스에 흑사병이 돌 당시 살아남았던 이탈리아 소설가 겸 시인 지오반니 보카치오는 "남녀 모두 사타구니나 겨드랑이가 부어오르면서 보통 사과나 달걀 만큼 커지며 사람들은 이를 가래톳으로 부른다"면서 "이는 죽음이 임박했다는 징후"라고 썼다.역사학자들은 흑사병이 확산한 경로를 중국 또는 중국 서부 인접지역에서 발원해 교역로를 따라 유럽, 북아프리카, 중동에 퍼진 것으로 추정해왔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의 추정은 한계가 있다. 흑사병을 일으킨 것이 예르시니아 페스티스균인지을 역사학자들이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흑사병은 감염자를 빠르게 숨지게 만들고 신체의 뼈에 흔적을 남기지 않아 실제 확산됐는지 여부를 확인하기가 어려웠다.이번 연구자들은 이같은 장벽을 넘어섰다. 피셀 박사는 흑사병 발원지를 찾는 일은 "탐정소설과 같은 일"이라면서 이번 연구자들이 "범죄현장의 확실한 증거를 확보했다"고 말했다.연구자들은 10년 이상의 연구 끝에 해골에 남은 치아에서 흑사병 유전자를 발견했다. 런던의 흑사병 희생자들도 연구대상이었다.14세기 런던 시민들은 흑사병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희생자들을 묻을 공동묘지를 준비했었다. 시신들은 화장됐으며 현재는 런던박물관에 유골이 보관돼 있다. 흑사병 사망자 무덤과 이들의 사망 시기가 정확히 밝혀져 있는 사실이 연구에 큰 도움이 됐다.연구자들은 런던 흑사병 희생자와 다른 지역 희생자 유골에 남은 유전자 물질을 분석해 흑사병 박테리아 변종의 DNA 가계도를 구축했다. 연구자들은 하나로 유지되던 예르시니아 페스티스 박테리아 줄기가 한 순간 4종으로 확대되고 이들의 변종이 현재의 설치류까지 이어지는 것을 확인했다. 이들은 박테리아가 갑자기 4종으로 늘어난 대폭발 시점을 추적했다. 역사학자들은 10세기에서 14세기 사이의 여러 시점이 대폭발일 것으로 추정해왔다.연구에 뒤늦게 가담한 슬라빈 박사가 키르기스스탄의 흑사병 사망자들을 조사했다. 이곳의 공동묘지 묘비들에 사망 시점이 정확하게 기록돼 있었다. 묘비명에는 고대 시리아어로 사망자가 "역병"으로 숨졌다는 기록도 있었다. 특히 1338년도 사망률이 크게 늘었다.연구자들은 "역병"으로 숨진 것으로 묘비명에 기록된 시신들의 치아에서 흑사병 DNA를 찾아냈다. 연구자들은 이들에게 흑사병을 옮긴 설치류가 마르모트라는 것도 밝혀냈다. 현재 이곳에 서식하는 마르모트에 있는 벼룩에 고대 예르시니아 페스티스 박테리아 직계 후손이 있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연구자들은 또 키르기스스탄의 박테리아가 4개의 변종으로 폭발한 몸통이라는 것도 확인했다. 피셀 박사는 이런 결과가 정확하다면 흑사병 박테리아 빅뱅이 유라시아에 흑사병이 퍼지기 직전에 대폭발이 발생했고 13세기 몽골군원정을 따라 확산했을 것이라는 일부 역사가들의 추정과 달리 실크로드를 따라 확산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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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도립국악단 토요공연 '그린국악'…현대성 더해진 무대코로나19로 중단됐던 전남도립국악단 토요공연이 '가무악회-그린국악'으로 이름을 바꾸고 재개한다.전남도립국악단은 21일부터 7월 9일까지 매주 토요일 오후 4시 남도소리울림터에서 토요 가무악희 '그린국악'을 선보인다고 16일 밝혔다.전남도립국악단은 지난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15년동안 토요공연을 선보였다. 다양한 국악공연을 통해 관람객의 박수를 받았지만 코로나19 이후 중단됐다.오는 21일부터 다시 시작하는 '그린국악' 공연은 현대적이고 대중적인 국악무대를 계획하고 있다.지난 정기공연으로 초연된 오라토리오 집체극 '봄날'과 여순 가무악희 '또 다른 숲을 시작하세요'의 갈라(gala) 프로그램이 관객을 만난다.또 기존 판소리와 민요를 재해석한 연창 판소리 '범피중류', 가야금병창 3중주 '방아타령', 중국 상하이민족악단 협력 작품인 무용극 '실크로드' 등이 무대에 선다.이 밖에도 전남도립국악단 단원들이 작곡하고 연주하는 대금 독주곡 '누구나 외딴섬이다', 창작 시나위 '파랑, 방' 등을 공연한다.공연장 야외 공간에서는 전남도립국악단 캐릭터 국악 프렌즈 '쿵' 대형 풍선 전시 이벤트가 진행되며 '그린국악 응원이벤트' '살짝 쿵 포토이벤트'도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통해 펼쳐진다.류형선 예술감독은 "토요 가무악희 '그린국악'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환경, 사람과 국악이 애틋하게 합체되는 전남 고유의 전통예술 상설공연이 될 것이다"며 "노래, 춤, 연주, 연희로 대변되는 전남도립국악단의 정체성과 환경 위기의 화두를 안고 지속가능한 공연문화를 정착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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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의 한류 이야기 27박상진(철학박사,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명예교수, 前 한국동양예술학회 회장) 한류를 형성하고 있는 요소는 보편성과 독창성이다.한국인의 장끼인 창의성과 끼가 한류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위 한류의 DNA라고 하는 한국인의 문화적‧예술적 역량은 어떤 근원에서 비롯되었을까? 동양미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논어의 내용 중 ‘화이부동(和而不同)과 위이불범(違而不犯)’에 대해 비교 설명을 함으로써 한국인의 문화적 성향을 파악해 보고자 한다. ‘화이부동’은 ‘절제의 미(美)’라고 하며 예(禮)에 해당하고 국악에서는 정악(正樂)에 해당한다. ‘위이불범’은 ‘자유의 미’라고 하며 악(樂)에 해당하고 국악에서는 민속악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화이부동’은 지나치지 않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화합형이다. 상대를 존중하고 이해하고 양보하니 하모니가 잘 이루어진다. 그러니 메뉴얼을 만들고 잘 지킨다. 산업화 시대에 적합한 민족이라고 할까. 아마 일본이 여기에 해당되는 민족이 아닌가 생각한다. ‘위이불범’은 자신을 드러내기를 좋아한다. 지나치지 않게, 그리고 창의적이고 끼가 많다. 그러니 돌출형들이 많다. 자기 주장이 강하다. 그러니 메뉴얼보다는 순간 순간 창의성과 임기응변, 즉흥성에 능하다. 디지털 시대에 적합한 민족이라고 할까, 한국(한민족)이 여기에 해당이 되는 민족일 것이다. 여기서 ‘화이부동’은 보편성이라고 할 수 있고, ‘위이불범’은 독창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20세기 중반까지는 세계에서 일본문화가 동양의 문화대표 격으로 행세를 하였다. 동양에는 일본문화만 존재하는 듯이 보였다. 그리고 일본 문화는 고급문화라는 등식으로 인식되었다. 한국문화는 중국과 일본에 가려져 보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한국문화는 중국문화의 아류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사실 한국은 선진 일본문화를 따라 흉내내기에 급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20세기 중반 이후, 거대한 ‘한류’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우리 민족의 원조인 동이(東夷)민족이 동양문화의 원형(原型)을 창조했듯이, 실크로드를 따라 중앙아시아를 넘어 유럽에까지 우리 문화가 넘실댔듯이 새로운 한류의 실크로드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화이부동(和而不同)과 위이불범(違而不犯)' 중 한국인들에게는 이 두 가지 사상이 모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는데 아마도 4 대 6 정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 민족은 ‘위이불범’에 가까운 민족으로서 창의적이고 끼가 많다. 일본인은 ‘위이불범’보다는 ‘화이부동’에 가까운 민족으로서 창의적이기 보다는 다른 나라의 문화를 모방하여 자기의 문화로 탈바꿈시키는데 능한, 소위 모방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일본은 관료주의가 발달하고 국가통치의 수단으로 모든 분야에 전자회로와 같은 매뉴얼을 만들어 국민들이 지킬 수 있도록 철저히 관리한다. 비상시국을 염려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일본국민 특유의 근면성으로 지금까지 잘 지켜져 왔다고 본다. 그러나 후쿠시마 원전 사고 등 일련의 비상사태를 목격한 우리는 그들의 창의적이지 못한 메뉴얼 국가 이미지를 확인하게 된다. 한국은, 드라마 ‘대장금’ 등이 일본과 중국을 거쳐 동남아에서 인기를 끌면서 "이것은 한류다”라는 용어가 중국에서 처음 등장하였다. 10여 년 전 중국 최고의 인민대회에서는 우리나라 드라마인 김수현, 전지현 주연의 ‘별에서 온 그대’를 거론하면서 중국에서는 이런 드라마를 왜 못 만드느냐고 자탄을 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K 드라마, K 팝 등이 세계를 요동치고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 국민들도 놀라고 정부도 한류에 대한 관심을 기울일 정도가 되었다. 그렇다면 싸이의 강남스타일과 같은 K 팝 등의 현상이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아픔을 겪으면서 황폐해진 환경 속에서도 우리 대중음악 문화는 꾸준히 발전하였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우리나라의 전통음악과 대중음악의 영향으로 정립된 엔카는, 다시 60년대 70년대를 거치면서 우리나라 트로트 음악계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전통가요의 장르로 발전하였고, 80년대 90년대 서양의 팝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우리 대중문화는 일렉트로닉 팝 문화의 장르까지 발전하여 왔다. 이러한 문화들을 섭렵하고 축적된 바탕에서 창의적 콘텐츠 개발의 산물이 바로 K-팝이다. 그러한 음악들이 바로 싸이의 ‘강남스타일’등이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정부의 지원금 받고 제작한 음악이 아니다. 제작해 놓고 보니까 세계 최고의 K-팝 음악이 된 것이다. 물론 글로벌 네트워크의 지원도 있었지만, 이 또한 민간 이벤트 업체의 역량 덕분이다. "하던 장난도 멍석 깔아주면 안한다”라는 한국의 속담이 있다. 예산 지원금 주면서 콘텐츠를 강요하고 간섭하게 되면 남의 작품 흉내만 내며 낭비만 초래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한국의 전통적 문화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토대와 환경을 구축하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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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문화교류, 동아시아문화도시 개막올해 동아시아문화도시 개막식이 25일 경주 월정교 일원에서 개최된다.문화체육관광부에 따르면 한·중·일 3국은 지난 2012년 제4회 한·중·일 문화장관회의 합의에 따라 2014년부터 매년 각 나라의 문화적 전통을 대표하는 도시를 동아시아문화도시로 선정해 문화교류 사업을 추진하고, 이를 통해 서로의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고 이해의 폭을 넓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올해 동아시아문화도시로 선정된 도시는 ▲한국 경주시 ▲ 중국 원저우·지난시 ▲일본 오이타현이다.이번 개막식에서는 한·중·일 주요 인사와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전통과 현대가 조화로이 공존하는 경주를 소개하는 다채로운 공연을 펼친다.'찬란한 신라문화 실크로드로 이어지다'라는 주제로 열리는 개막 공연에서는 신라의 태동에서부터 평화와 번영의 역사를 넘어 동아시아의 공동 번영과 화합에 기여하는 역사문화도시 경주의 미래를 보여준다.경주는 이번 개막식을 시작으로 '문화로 여는 경주, 동아시아를 잇는 평화'라는 표어 아래, 7월 동아시아 청소년 문화예술제, 풍요로움을 전하는 동아시아의 등불행사, 9월 동아시아 문화 학술 토론회, 11월 한옥문화박람회, 폐막행사 등 다양한 문화교류 협력사업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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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의 한류 이야기 24박상진(철학박사,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명예교수, 前 한국동양예술학회 회장) 과거 한반도가 중국, 일본, 러시아의 각축장이 되고 일제강점기, 분단과 한국전쟁,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북핵 위기까지도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1차 대분기(大分岐)라고 하는 산업혁명에 실패하여 부국도 강병도 하지 못한 결과가 초래됐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2차 대분기라고 하는 4차 산업혁명에 또다시 실패하게 된다면 우리 후손들이 또 어떤 치욕과 불행을 겪게 될지 심각하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강대국 간의 이해관계와 북핵위기는 우리가 주도적으로 해결해 나가야만 할 절제절명의 위기이다. 따라서 위와 같은 대한민국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길’을 선택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대한민국은 동북아에서 확실한 전략적 선택지를 가지고 있다. 그 선택지란 "한-중-일의 연횡과 한-미-러의 합종(合從)의 균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안타깝게 중단된 한-중-일의 연횡을 되살려서 동북아가 인류문명의 중심에 우뚝 서는 방법은 한-미-러의 합종을 통하여 연횡의 한계와 문제점을 극복해 나가는 것이다. 이들 4강의 관계는 한마디로 견제와 균형이다. 미중관계는 대표적인 견제와 균형관계이다. 미일관계는 겉보기에는 일본이 미국 쪽으로 쏠린 듯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 특유의 겉마음(다테마에: 建前)이다. 일본의 속마음(혼네: 本音)에는 원자폭탄과 1985년 9월 미국 플라자호텔에서 엔화 강세를 압박한 ‘플라자 합의’의 한(恨)이 서려 있다. 물론 미국도 이러한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다. 러중 관계는 러시아의 자원과 군사력이 중국의 경제력과 상호보완 관계에 있다. 미국의 러시아 제재와 미국의 중국 견제에 대항해 당분간 힘을 합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14억 인구의 중국과 1억 4천만 인구의 러시아가 과거 중국의 영토가 포함된 광대한 극동러시아를 두고 다투게 될 것이다.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관계도 복잡하다. 현재 일본이 영유권을 주장하지만 러시아가 실효 지배하고 있는 쿠릴 열도 4개 섬에 대한 영토분쟁이 언제 사할린까지 번져갈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김태유 교수는 '한국의 선택'에서 "이상 4강 간의 피할 수 없는 팽팽한 구조적 긴장관계는, 오히려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연횡과 합종의 균형을 우리가 주도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힘의 원천이다. 이것은 그동안 인류문명의 발전 원리와 패권의 비밀을 경제이론과 역사적 실증 작업을 통하여 도출된 결론이다”(김태유 글 발췌)라고 하였다. 세계사를 돌아보면 실크로드로부터 지중해, 발트해, 대서양, 태평양, 인도양 등 새로운 물류를 개척하고 장악한 국가가 세계 문명과 패권을 좌지우지했다. 중국이 명나라의 장수이며 탐험가인 정화((鄭和, 1371~1434)가 개발한 물류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면 그 이후의 비극적인 운명을 피했을 뿐만 아니라 유럽으로 기운 패권의 축이 반대로 기울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우리 앞에 새로운 물류가 열리고 있다. 바로 가시적으로 ‘북극항로’이며, 비가시적이지만 더 큰 의미가 있는 ‘데이터 유통’이다.(이대식 글 참조) 주목할 점은 이 두 가지 새로운 물류 부문에서 한국이 글로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유력한 조력자가 바로 러시아라는 사실이다. 우선 러시아는 북극해 연안의 60%를 차지한다. 북극항로를 통해 부산과 로테르담을 운행할 경우, 기존 수에즈운하를 통한 운항보다 거리는 32%(2만 2,000km⟶1만 5,000km), 운항 일수는 10일(40일⟶30일)을 줄일 수 있다. 시간과 비용을 모두 절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북극 및 러시아에서 생산되는 천연 지하자원 ‧ 광물자원 등을 직송할 수 있는 루트가 새로 생긴다. 그런데 북극항로는 단순한 경제성 이상의 가치 외에 북극항로에 의해서 인류사상 처음으로 북방과 남방이 연결되는 새로운 본래적 의미의 글로벌 물류가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한국 정부가 추진하는 신남방정책과 신북방정책을 잇는 매개가 바로 북극항로이다. 일본은 벌써 우리보다 이 점을 먼저 간파하여 북극-태평양-인도양을 잇는 가스 물류 벨트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2019년 러시아의 북극 액화천연가스(LNG) 개발 프로젝트인 북극(Arctic) LNG 2 사업에 10% 지분 투자를 결정했고, 북극항로가 본격화될 경우 환적항이 될 극동 아시아의 캄차카항과 유럽 북단의 무르만스크항에 투자를 시작했다. 또한 일본의 사이부가스와 규슈전력(Kyushu Electric Power Co.)은 2018년부터 노바텍사와 캄차카 환적항과 일본의 규슈 지역의 히비키 터미널(Hibiki Terminal)을 연계하는 논의를 해왔으며, 히비키 터미널에 LNG 벙커링 사업을 시범적으로 하는 방안도 진행되고 있다. 일본은 동시에 미국, 호주와 연대하여 인도 ‧ 태평양 에너지 물류 벨트를 구축하는 전략도 추진하고 있다. 2018년 11월에는 미국과 일본, 호주의 주요 정부 당국자들과 금융기관 대표들이 만나 동남아 국가들이 저장탱크, 항만 등 LNG 수입 인프라를 갖출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하자고 합의했다. 일본 정부는 이 사업에 100억 달러(약 11조 원) 규모의 투자를 집행할 계획이다. 일본 정부는 여기에 도쿄 등에 LNG 거래소를 만들어 싱가포르를 대체하는 LNG 거래시장을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이로써 일본은 북극-캄차카-히비키-필리핀-아세안-인도로 이어지는 거대한 글로벌 LNG 체인을 구축하고 있다. 새로운 물류를 장악하기 위한 경쟁이 에너지 부문에서부터 이미 본격화되고 있는 것이다. 중국 또한 북극항로에 엄청난 투자를 진행하며 마치 북극항로를 자국의 내해로 만들려는 야심을 드러내고 있다. 한국이 서두르지 않으면 단군 이래 처음으로 온 글로벌 물류를 선도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될 것이다. *‘한류와 4차 산업혁명(4)’의 내용은 '한국의 선택'(김태유‧이대식 엮음,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발행)중 김태유 ‧ 이대식의 글을 인용 및 참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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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의 한류 이야기 21박상진(철학박사,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명예교수) "박상진의 한류 이야기”는 문화와 문명사적 테두리 안에서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문화를 들여다보며, 한류 문화가 미래를 향해 지속적으로 발전하기를 염원하는데 그 의미를 담고 있다. 최근 ‘한류’는 K-POP의 BTS는 물론, 오징어 게임 ‧ 기생충 등 다양한 분야에서 우리도 놀랄 정도로 세계인들이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고 있다. 영국의 BBC 방송에서는 "‘오징어 게임’의 인기는 갑자기 나타난 현상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최근 몇 년간 서구 전역에 만들어진 ‘한국 쓰나미’의 가장 최근 물결”이라고 보도했다. BBC는 한국 등 아시아의 정치 경제적 흐름에 따른 사회 분위기의 변화라고 짚었다. BBC는 "1990년대 한국의 자유화 분위기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큰 투자를 만들어냈고, 일본이 경기 침체로 고전하는 동안 중국이 부상했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한국 문화도 주목받기 시작했는데, 아시아권에선 미국보다 한국이 만든 프로그램이 더 공감을 이끌어냈고, 중국 프로그램보다 정서적으로도 구미에 맞았다”라고 분석했다. 한국 드라마 팬인 영국 작가 테일러–디오르 럼블은 "세련되고 화려한 연출, 환상적인 내용으로 현실도피에 알맞았다.”라고 하면서 "특히 부채 ‧ 실업 등 경제적인 문제들은 팬데믹을 극복하기가 상대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라고 봤다.(국민일보 기사 참조) 영국 일간지 가디언이 보도하기를, 전 세계 5억 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는 외국어 학습 애플리케이션 ‘듀오 링고’에서 ‘오징어 게임’ 방영 직후 한국어 학습자가 영국에서 2주 만에 76%, 미국에서는 40%나 늘었다고 했다. 현재 전 세계 듀오 링고 한국어 학습자는 80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한국어를 제1외국어로 택하는 외국의 대학들도 늘어나고 있다. 듀오링고 측은 이렇게 치솟는 한국어 학습 수요의 동력을 ‘한류’의 영향이라고 했다. 식민지와 전쟁을 겪으며 제기할 수 없는 폐허 속에서 세계 10위 경제권으로 우뚝 선 나라는 세계사적으로 볼 때 한국이 유일하다고 한다. 이것을 우리는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작금의 한류도 ‘한강의 기적’의 토대 위해 형성된 한국인의 창의적 상상력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다. 한동안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국내외의 정치 상황과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수성을 고려한다면 과연 한류는 꺾임 없이 지속 가능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이 든다. 산업화는 늦었어도 정보화는 앞 당기자라는 국정철학은 우리나라를 현재의 정보화 선진국으로 도약하게 했다. 그렇다면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들어섰다고 하는데, 이를 성공시킴으로써 제2의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내고 한류를 지속시켜야 할 텐데 우리는 그것에 대한 준비는 하고 있는 것인지를 돌아보게 된다. 따라서 여러 정치 상황과 한반도의 지정학적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모색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인류 문명사를 되돌아보면, 새로운 길이 열릴 때 비로소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서울대학교 명예교수 김태유 글 참조) 인류 문명사의 ‘새로운 길’인 변곡점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겠다. 실크로드(Silk Road)가 처음 열린 것은 기원전 100년을 전후한 때이다. 동방의 비단, 도자기 같은 상품과 화약, 종이 등의 제조기술이 서역으로 갔고, 서역의 향신료인 후추와 호두, 깨 등과 유리제품 및 제조기술이 동방으로 들어왔다. 이때 실크로드 선상에 있는 그리스, 로마, 페르시아, 이슬람, 훈, 몽골, 중국 등의 고대문명이 번영하게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동북아시아가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인류 문명의 중심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향신료길(Spice Route)이 본격적으로 열리기 시작한 것 8세기 경이다. 인도네시아의 말루크제도에서 생산된 후추, 정향, 육두구, 계피, 침향 등의 향신료가 중동지역을 거쳐 알렉산드리아와 콘스탄티노플에서 지중해로 넘겨졌다. 11세기에 시작된 십자군 전쟁 등의 기독교와 무슬림 간의 천년을 이어온 숙적 관계는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기 위한 뺏고 빼앗기는 싸움이었다. 이때 전성기를 맞은 이슬람 문명은 그리스 로마의 고전과 페르시아 인도 문화를 종합 발전시켜 르네상스 문화의 기반을 제공한다. 1488년 이후 네덜란드는 동인도 회사를 앞세워 선발 주자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제치고 새로운 항로인 희망봉을 통하여 향신료 무역을 독점함으로써 상업혁명(Commercial Revolution)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기존의 향신료 길에 의존하던 중동 무슬림과 지중해 기독교 문명이 동반 쇠퇴하고 본격적으로 서유럽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1784년 네덜란드를 제압한 영국은 5대양 6대주에 해가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을 건설한다. 향신료와 차 무역에 이어 영국은 면직물 생산을 시작함으로써 제조업에 기반한 산업혁명((Industrial Revolution)을 일으킨다. 8천 년 동안 이어져 온 기존의 농업문명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시대의 문명이 탄생한 것이다. 상업 제국으로 시작된 영국의 세기(Pax Britannica-영국의 지배에 의한 패권)는 산업혁명이라는 문명사적 대변혁을 통하여 역동적으로 발전하는 산업문명사회를 열어간다. 가난과 질병과 신분의 족쇄로 고통받던 농업사회의 대중에게 풍요와 건강과 자유민주 질서를 가능케 한 산업혁명은 한마디로 인류 문명 사상 가장 큰 축복의 서막이었다.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더 빨리 더 크게 발전하여 현재는 미국의 세기(Pax Americana-미국의 힘에 의해 유지되는 패권) 로 절정에 이른 현대산업 문명의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다. 그야말로 인류문명은 인간의 경제활동에 의해 창출된 가치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상업혁명으로 범선을 타고 5대양을 종횡으로 누비기 시작한 서유럽인들은 지구상의 모든 땅을 식민지화하기 시작했다. 당장 주인 없는 빈 땅은 필요하든 말든 사막과 동토를 가리지 않고 바다 멀리 외로운 돌섬에서 대륙붕에 이르기까지 모두 깃발을 꽂아 점령해 버렸다. 3차 산업혁명(The Third Industrial Revolution)을 처음 언급한 미래학자 제레미 리프킨은 태양광, 풍력 등 친환경 신재생에너지의 출현과 마이크로그리드 등이 정보통신기술(ICT)과 결합해서 출현한 새로운 경제로의 발전과정이라고 3차 산업혁명을 언급했다. 소위 우리가 말하는 정보화 사회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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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has published three books on the research results of Goryeo metalworks and Silk Road artThe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NRICH; JI Byongmok, Director General) of the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has published three books - Understanding the Goryeo Metalwork 2, Encyclopedia of the Silk Road Western Region: Central Asia (Western Turkestan),and The Art of Silk Road: New Research Trends and Perspective. Understanding the Goryeo Metalwork 2 is the sequel to Understanding the Goryeo Metalwork published in 2020. This edition features a collection of 130 household crafts from the Goryeo Dynasty. There have been few remaining relics or documentary records that are seldom available for viewing. The book features small knives, needle case, makeup brushes, and other miscellaneous personnel objects used by the Goryeo people, as well as accessories such as bracelets and hairpins. For an easy and accurate understanding of these artifacts, detailed names, terms, and uses are provided along with drawings and pictures.*needle case: A cylindrical case to keep needles Encyclopedia of the Silk Road Western Region: Central Asia (Western Turkestan) is a follow-up study to Encyclopedia of the Silk Road Eastern Region: Xinjiang of China published in 2019. While the earlier publication deals with the eastern part of the Pamir Plateau, this volume covers its western part - Central Asia and a part of West Asia. The book contains 33 thematic studies on various subjects encompassing history, religion, Buddhist art, and crafts of this region where research has been challenged by limited access to the relics and materials. For over three years since 2018, NRICH and experts in related fields have compiled domestic and foreign research results and arranged photos, maps, lists of plates, and references to enable easy understanding.* Pamir Plateau: A plateau in Central Asia spanning Tajikistan, China, India, Pakistan and Afghanistan. The Art of Silk Road: New Research Trends and Perspectivecontains six different articles onSilk Road art in Central Asia, written by the world renowned scholars from the U.S., Germany, Italy, and Japan. This book, published in both Korean and English, intends to publicize the latest international research results on Silk Road art at home and abroad. These volumes will be distributed to domestic and overseas public libraries and related research institutes. E-books will also be available on the official website of the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www.cha.go.kr) and the NRICH Cultural Heritage Research Knowledge website (www.nrich.co.kr) for public viewing. NRICH will continue to strive in earnest to conduct research on artistic heritage and disseminate them at home and abroad for stimulatingworldwide public interest in Korean cultural heri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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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문화재연구소, 고려 금속공예와 실크로드 미술 연구 성과 담은 책자 3종 발간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지병목)는 고려 시대 금속공예품의 종류별 특징을 정리한 '고려 금속공예의 이해2'와 실크로드 미술 문화에 대한 '실크로드 미술사전 서부: 중앙아시아 서투르키스탄', '실크로드 미술-연구 현황과 전망' 등 책자 3종을 발간했다. '고려 금속공예의 이해2'는 2020년 발간된 '고려 금속공예의 이해'의 후속편으로, 이번 편에는 유물이나 문헌 기록이 적고 실견하기 어려운 소형 칼, 침통, 솔 등 고려 사람들이 사용하던 신변잡구와 팔찌, 비녀 등 장신구와 같은 고려 시대 생활 공예품 130여 점을 모아 수록했다.또한 사진, 도면과 함께 세부 명칭, 용어, 용도 등도 수록해 국민 누구나 쉽고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했다.'실크로드 미술사전 서부: 중앙아시아 서투르키스탄'은 2019년 발간한 '실크로드 연구사전 동부: 중국 신장'의 후속 연구서로, 동부편이 파미르 고원 동편을 다루었다면 이번 서부편은 파미르 고원 서편의 중앙아시아 지역과 서아시아 일부 지역을 대상으로 했다.책자에는 유물이나 자료 접근의 한계로 연구의 어려움이 많았던 실크로드 서부 지역의 역사와 종교, 불교미술, 공예품, 관련 유적을 망라한 33건의 주제에 대한 연구 성과가 사진과 지도, 도판 목록, 참고문헌과 함께 담겨있다.이를 위해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18년부터 3년여 간 관련 분야 전문가들과 함께 지금까지 축적된 국내·외 연구 성과를 집대성했다. '실크로드 미술-연구 현황과 전망'은 미국,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 세계 각국의 실크로드 미술 연구자들이 참여해 중앙아시아 지역 실크로드 미술에 대한 국내·외 최신 연구 성과를 6건의 논고로 정리한 책자이다.이 책자에는 국문과 함께 영문도 수록해, 실크로드 미술과 관련한 최신 연구 성과를 국내·외에 널리 알리도록 기획됐다.책자는 국내·외 국공립 도서관과 관련 연구기관 등에 배포하고, 문화재청 누리집과 국립문화재연구소 누리집(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에 공개해 누구나 열람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미술 문화재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진행해, 우리 미술 문화재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높이고, 이를 국내·외에 널리 공유할 수 있도록 노력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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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앙아 수교 30주년 기념 미디어아트 공모전’ 수상작KF(Korea Foundation,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이근) 한-중앙아협력포럼 사무국은 한국-중앙아시아 수교 30주년을 기념해 열린 ‘한-중앙아 수교 30주년 기념 미디어아트 공모전’ 수상작 3건을 발표했다. 총 3건의 수상작은 한국과 중앙아시아 관계에서 나타나는 역사적 의미와 시공간 이야기, 문화 요소를 분명하면서도 친근하게 영상으로 구현해 심사위원단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대상 ‘일월오국도 日月五國圖(같은 시간과 공간아래)’는 한국과 중앙아시아 5개국 전통 문양을 적용해 작품 속 땅과 산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각국 대표 건축물의 외형을 채색해 나타냄으로써 모두 같이 소통·번영하는 희망의 미래를 표현했다. 최우수상 ‘빛, 여정 그리고 동행’은 한국이 실크로드 중심지이자 아름다운 도시들로 이뤄진 중앙아시아와 과거부터 소통해왔으며, 먼 미래에도 기술과 문화 분야의 교류를 이어나갈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우수상 ‘Coming from the middle ground (중간지대로부터)’는 한국과 중앙아시아 5개국 전통 문양과 실제 데이터 기반 인공지능 기술로 그려낸 디지털 실크로드의 이미지를 영상 시(video poetry)로 구현한 작품이다. ‘2022년 중앙아시아 봄맞이축제’를 계기로 진행된 이번 공모전 수상작은 2022년 3월 중앙아시아 봄맞이축제 미디어아트 전시를 통해 대중에 공개될 예정이다. 한국교류재단은 한국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이해를 돕고 국제적 우호 선친을 증진하기 위해 1991년 설립된 우리나라의 대표 국제 교류 전문 기관이다. 해외 한국학 연구 기반 조성과 인적 문화 교류 사업, 해외 문화 센터 운영 등의 다양한 교류 활동을 통해 한국 문화, 한국어, 한국인을 해외에 알리고 세계와 한국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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